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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 봄, 봄을 괜히 기다렸다

정성운
텃밭농부


겨울은 추워야 제맛이라지만, 추위는 고통이다. 두터운 외투와 목도리로 온몸을 꽁꽁 싸매어도 손과 발, 얼굴을 휘감는 냉기는 어쩌지 못한다. 어깨가 움츠러들고 목덜미가 오싹하다. 실내에서 일하는 사람들이야 바깥출입을 줄이면 되겠지만, 온종일 실내에 머물 수는 없다.
추위가 한창이던 때에 약속이 있어 나갔다. 그날 해질녘에 집으로 돌아왔는데, 피로가 확 몰려왔다. 관절 마디가 욱신거렸다. 뜨거운 보리차를 마시고 침대에 누웠는데, 어느새 잠이 들었다. 추위를 견디느라 몸이 꽤나 힘들었던 것이다. 야외에서 오랜 시간을 보내야 하는 사람들에겐 겨울은 혹독한 시절이다.


겨울은 추워야 제맛이라지만


농사짓는 이들에게 겨울은 차라리 추워야 한다. 해충의 알을 동사시켜 개체 수를 줄이고, 잡초도 잡아준다. 춥다는 핑계로 밭에 나가지 않았다. 텃밭농부들에게 겨울엔 밭에 나가는 횟수가 줄어든다. 딱히 할 일이 없다. 눈과 바람에 그냥 맡겨두면 된다. 밭에는 마늘과 대파를 심었는데, 부직포를 덮어 두었다. 두 작물은 흙 속에서 하얀 뿌리를 내린 채 생장을 멈춘다. 그렇게 겨울을 견뎌낸다.
소한에서 대한을 지나는 2주간은 일년 중 가장 추운 시기다. 올해도 어김없이 혹한이 닥쳤으며, 2월 내내 추위의 기세가 꺾이지 않았다. 한낮에도 기온이 영하에 머물렀고, 바람은 거셌다. 북극에 머물던 냉기 덩어리가 한반도를 덮었다고 기상청은 전했다. 해가 지면 거리는 금세 한산해진다. 추위가 길어지니 힘들다. 다행스럽게도 추운 날임에도 햇살은 눈부셨다. 추운 날 구름까지 잔뜩 끼면 을씨년스러움이 더해져 더 크게 추위를 느끼고, 몸이 움츠러든다. 햇살이 고맙다. 저 햇살처럼 따스운 봄이 어서 오기를, 봄이 기다려진다.
실내에서 보내는 시간이 길어지면 밭이 문득 궁금해진다. 좀이 쑤신다. 이럴 땐 밭에 나간다. 딱히 할 일이 있어서 가는 것이 아니다. 휘 둘러보고 흙을 밟고는 돌아온다. 바람에 부직포가 날리지 않았는지 살펴보고는 들썩이지 않도록 단도리를 해준다. 추워서 오래 머물지 못한다. 어서 집으로 가라고 바람이 등을 떠민다.
밭에 나가지 않는 요즘은 집 창가에 관상용으로 심어둔 감자와 아스파라거스 새싹을 살피는 일을 조그만 낙으로 삼는다. 어느 날, 부엌 옆 창고 종이상자에 넣어둔 감자에 싹이 올라온 것을 보았다. 그중 하나를 골라 싹을 하나만 남기도 화분에 옮겨 심었다. 1주일쯤 지나니 한 뼘쯤 자랐다. 싹을 보는 재미가 쏠쏠하다.
아스파라거스는 씨앗을 화분에 심은 것이다. 아스파라거스는 가을에 빨간 열매를 맺는다. 동그란 열매 하나에 5, 6개의 씨앗이 들어 있다. 이 씨앗들이 싹을 틔웠다. 봄이 되면 밭에 옮겨 심을 예정이다. 더덕도 화분에 심었다. 더덕은 씨앗을 많이 맺으며, 심었던 자리 주변에서 싹이 올라온다. 그냥 놓아두면 너무 빽빽하게 자란다. 지난 가을에 이것들을 캤다. 적당한 간격을 두어 옮겨 심어야 한다. 옮겨심기 전에 화분에 심어 겨울을 나게 하는 것이다.
밭에 나가지는 않지만, 농사는 2월부터 시작된다. 씨앗을 준비해야 한다. 꺼내 말려주고, 쭉정이를 골라낸다. <농가월령가>에서는 2월(음력으로는 정월)을 넓은 들과 벌판의 경치가 변하는 시기라면서, 때를 놓치지 않도록 농사 준비를 하라고 일러준다.


정월은 초봄이라 입춘 우수 절기로다.
산 속 골짜기에는 얼음과 눈이 남아 있으나,
넓은 들과 벌판에는 경치가 변하기 시작하도다. …
일년의 계획은 봄에 하는 것이니 모든 일을 미리 하라.
만약 봄에 때를 놓치면 해를 마칠 때까지 일이 낭패되네. …
[이영훈 풀이]


2월은 막둥이 같은 달


2월은 짧아서 애잔한 달이다. 막둥이 같은 달이다. 내 어머니와 아버지는 막내인 내게 듬뿍 애정을 주셨다. 어머니가 나를 낳은 나이는 43세. 한참 늦은 출산이었으니 병 없이 잘 크기를 바라셨다. 내가 커서는 “너 장가가는 거 보고 죽을지 모르겠다”라는 말씀을 하시곤 했다. 어머니는 막내며느리를 보셨고, 고등학교 2학년의 손자가 당신의 영정사진을 들었다. 막내아들에 대한 시름은 내려놓으셨을 것이다.
2월은 설레는 달이기도 하다. 봄이 저만치 오고 있으니 어찌 설레지 않을 수 있겠는가. 이채 시인은 ‘2월의 기다림’이라는 시에서 “내 당신 기다림에 얼음이 되었어도/내 가슴 벌써 분홍꽃이 피었어요”라며 설레는 마음을 다독인다. “이제 정말 봄이 오려나봐요/어서 와요, 예쁜 아가씨.”
계절의 봄은 기다리면 어느 순간 곁으로 오지만, 사람 사는 세상의 봄은 기다린다고 오지 않는다. 만들어내야 한다. 대승불교의 꽃이라 불리는 『화엄경』 「십지품」에서는 열 가지 바라밀행을 권한다. 보시·지계·인욕·정진·선정·반야의 육바라밀에 네 가지를 더하고 있다. 방편·원·력·지. 『화엄경』의 놀라움은 앞의 여섯에다 뒤에 넷을 더해 보살행으로 나아가는 실제적인 방법을 제시한 데 있다. 불교는 결국 보살의 행함에 있다는 것을 강조한 대목이다.
방편을 구하지 않고, 원을 세우지 않고서는 행行이 이루어질 수 없다. 지도 없이 큰 산을 넘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역은 힘, 곧 실력이라고 볼 수 있다. 무엇을 이루려면 그에 걸맞는 바탕을 다져야 한다. 42.195km를 뛰려면 육체의 한계와 정신적인 주저함을 이겨내는 강인한 체력과 인내력이 갖춰져야 한다. 지는 기술이다. 코스를 잘 살펴야 하고, 페이스를 조절할 줄 알아야 한다. 완주는 물론 좋은 성적을 이루기 위한 구체적인 방법이다.


우리는 이미 봄을 살고 있다


10바라밀의 첫 번째는 보시이다. 이는 바라밀행의 궁극이 보시에 있음을 말한다. 지계, 인욕, 정진 등 9가지 바라밀은 보시를 행하기 위함이다. 보시는 곧 중생 구제이다. 중생을 안락하게 하는 일이다. 재물을 베푸는 것만이 보시가 아니다. 빈부의 차이가 격심한 자본주의 사회에서 재물을 베푸는 재시는 긴급하다. 가난한 이들이 삶에 좌절하지 않도록 하고, 기본적인 생활을 꾸려가도록 하기 위해서는 재시를 놓쳐서는 안 된다.
아울러 불교에서는 법시와 무외시를 강조하고 있다. 법시法施는 중생이 진리를 구하러 오거든 자기가 아는 대로 좋은 방편을 써서 이야기해 주되, 명예나 이익이나 존경을 받기 위해서가 아니라, 오직 수도상의 이익과 남의 구제를 위하여 이익을 줄 수 있게 되기만을 염원하면서 행하는 것이다. 무외시無畏施는 어떤 사람이 재액을 만나고 어려운 일을 당하여 공포와 위험 앞에 놓여 있을 때 자기가 스스로 그 난을 받아 감당하고 그 사람을 공포 속에서 구출해 내어 평화와 안전을 베풀어 주는 보시이다. 무주상보시無住相布施는 익히 들어온 가르침이다. “내가 누구를 위하여 무엇을 베풀었다”는 자만심 없이 자비스러운 마음으로 온전하게 베푸는 것을 뜻한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인간 세상의 봄은 멀리서 오는 것이 아니다. 보시가 위와 같은 것이므로 누구든 돈 없이도 보시를 행할 수 있다. 서로 위로하고 안락하기를 바라는 따뜻한 마음이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미 봄을 살고 있다. 봄을 괜히 기다렸나 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