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종숙_수필가
기다림이 있다는 것은 아름다운 일이다. 기다림은 꿈과 희망을 갖게 하고 기다리는 시간을 인내와 이해로 극복하게 한다. 누군가를 기다리며 산다는 것은 그 속에 그리움을 간직하며 사는 일이다. 오지 않을 사람이나 이미 잊혀진 사람을 그리워하는 애절함은 상상만하여도 가슴 아프다. 나는 의암호를 지나칠 때마다 가슴을 적시는 그 비련의 여인을 보게 된다.
멀리 의암호 물줄기 밖으로 춘천을 에워싸고 있는 산봉우리들과 강마을 속에서 아련하게 꿈꾸고 있는 맑디맑은 심성을 가진 여인! 그녀는 지금도 수 십 년의 세월을 안고 열여덟 꽃다운 나이에 순정을 받쳤던 정든 님을 기다리고 있다. 그녀의 애잔하고 슬픈 추억은 오늘도 푸른 파도를 타고 북한강변을 시름없이 맴돌고 있는 것이다.
오래전부터 소양강은 시인 묵객이 한번쯤 찾아와 쉬다가고 싶은 곳이었다. 풍광이 아름답기로 소문 나 있어 다산, 김시습 등 유명인들이 다녀간 흔적이 작품 속에 남아있는데 어린 날 내 눈에도 소양강변에는 머리 푼 수양버들이 무척이나 많이 늘어서있던 기억이 난다. 자갈밭 강변에서 바람이 불면 머릿결 휘휘 날리며 춤을 추던 버들잎, 갈대밭 우거진 습지에서 풀 손 흔들어 주던 가녀린 넋들은 지금 소양호 상류에서나 볼 수 있는 아름다움이 되었다.
김도수는 그가 지은 <소양가>에서 얼굴이 백옥 같은 이웃집 계집아이를 들먹인다. 늘어진 수양버들과 봉황대로 날아간 물새 등 이별을 놓고 황혼에 물든 소양강의 아름다움을 생각하며 잠들지 못한다. 이달충 역시 <차 춘일 소양강행>에서 여인과 하룻밤을 지냈던 옛일을 추억하며 늙어버린 세월을 한탄한다. 그 여인들은 시들의 행간 속에서 살다가 잊혀져 갔지만 국민가요 제 1위를 연속적으로 지켜왔던‘소양강 처녀’는 아직도 우리들 가슴에 연분홍 꽃빛으로 남아 있다.
나는 40이 훨씬 넘어서야 가요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 어느 날 버스에서 흘러나오던 유행가 가사를 유심히 듣다보니 인생의 희·노·애·락이 그곳에 그대로 반영돼 있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때까지도 자고 깨면 으레 매스컴에서 흘러나오던 노랫가락을 귓등으로만 흘려보냈는데 어느 날 지우들과 만나 노래방을 들렸을 때 누군가가‘소양강 처녀’를 불러보라고 권했다. 귓전으로만 흘려듣던 그 노래를 모든 사람들이 다 같이 합창을 하며 좋아하는 것을 보고 새삼 놀랐었다.
나는 이제야 사람들이 왜 소양강처녀에 대해 열광하는지 알듯 했다. 노래가사에서 풍기는 이미지가 한국여인의 정서를 그대로 안고 있기 때문이다.
‘해 저문 소양강에 황혼이 지면 / 외로운 갈대밭에 슬피 우는 두견새야 / 열여덟 딸기 같은 어린 내 순정 / 너마저 몰라주면 나는 나는 어쩌나 / 아아 그리워서 애만 태우는 소양강 처녀’
소절, 소절마다 애상을 풍기는 감각적인 언어가 앳되고 순박한 여인의 사랑과 그리움을 떠올리고 있다. 60년대 우리나라에 정착해있던 기성세대들은 슬픔과 이별, 사랑을 밑바탕에 깔고 있는 노래들을 즐겨 불렀다. 산업사회로 접어들면서 고달픈 인생살이에 대한 회한을 적절히 풀어내는 노래를 부르곤 했는데 그 때는 일제 강점기를 지나서 6.25의 상흔을 겪고 난 후라 어렵고도 힘든 세월을 헤쳐 나가야 했던 고난과 역경의 시대였다. 지금도 그 세대들은 락이나 팝보다 심금을 울려주는 슬픈 노래 가락의 트로트를 더 좋아한다고 믿고 있
다. 반야월씨는 상징적인 지역문화와 그 시대에 부응하는 노래를 많이 지어 세속적인 삶의 애환을 달래주었다.
‘소양강 처녀’를 짓게 된 동기 역시 한국가요 반세기 작가동지회에 자주 드나들던 반야월 씨가 그 사무실의 가수지망생이었던 아가씨를 따라 춘천을 다녀가면서였다. 그녀의 아버지는 소양호변에서 고기잡이를 하며 살고 있었다. 두 사람은 모처럼 배를 타고 유람을 하면서 하루를 즐겼는데 그녀의 애절한 사랑이야기를 들으며 노을이 드리운 강가의 풍경과 함께 그 정경을 잘 살려냈던 것이다.
소양강처녀는 한국인이라면 누구나 저변에 깔려있을 애틋한 그리움의 표상이다. 어린나이에 마음 주었던 순정을 잊지 못해 애를 태우는 빛 고운 여인의 상징이기도 하다. 뼛속 깊이 사무치는 아련한 추억이 슬프고도 간절하게 호수를 채우고 있다. 그녀의 손에도 강바람에 떨고 있을 갈대 잎이 들려있다. 어쩌다 간간히 소양2교를 지나칠 때면 내 곁을 떠나지 않고 있는 열아홉 순정도 보인다.
그래서일까? 남춘천역에서는 춘천을 찾아오는 손님들에게 김태희씨의‘소양강 처녀’노래를 틀어주고 있다. 기다림을 안은 여인과 춘천의 수려한 풍광을 한국의 정서로 오래오래 간직할 수 있도록 가슴을 울리는 노랫말이 아름답고도 구슬프게 들려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