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현
한겨레신문 종교전문기자
<트로이>는 2004년 개봉된 볼프강 피터젠 감독 의 웅대한 전쟁 영화다. 지상 최대의 서사시인 호 메로스의 <일리야드>를 원작으로 만들어졌다.
3200년 전, 아가멤논왕은 전쟁으로 그리스 대부분 을 차지했다. 아가멤논왕의 아우인 스파르타의 왕 메네라우스는 전쟁에 지친 나머지 최대 라이벌인 트로이와 평화협정을 체결한다. 그런데 평화협정 을 위해 메네라우스의 궁전에 형 헥토르왕자를 따 라온 팔리스왕자는 메네라우스의 왕비 헬레네와 밤마다 은밀한 사랑을 나눈다. 평화협정을 맺고 모 처럼만에 선상에서 평화의 기분을 만끽하고 있는 형에게 팔리스는 소개할 사람이 있다고 한다. 배안 에 숨겨 데려온 헬레네다. 철없는 아우의 불장난에 형은 기겁을 하지만 이미 평화는 깨져버렸다.
인물은 아킬레스(브래드 피트)다. 바다의 여신 테티스와 인간인 펠레우스 사이에서 태어난 아킬레스는 어
머니 테티스가 그를 불사신으로 만들기 위해 스틱스 강(황천)에 담궜을 때 손으로 붙잡고 있던 발뒤꿈치
(아킬레스)에만 강물이 묻질 않아 그곳은 급소가 되었지만, 인간 중에는 당할 자가 없을 만큼 초인적인 힘
과 무예를 가진 천하무적이기 때문이었다. 모든 병사들이 트로이 해변의 상륙을 두려워할 때 오직 한 무리의 군대만이 질풍노도처럼 적군을 파고 든다. 아킬레스와 그의 병사들이다. 해변과 바다의 정면엔 거대한 성전이 있다. 아폴로 신전이다. 트로이 인들을 지켜준다고 믿는 아폴로 신전에 다다르자 아킬레스의 병사들마저 아폴로신의 보복이 두려워 공포 에 떤다. 이 때였다. 아킬레스는 거대한 아폴로신상의 목을 단칼에 날려버린다. 아폴로신의 보복을 두려워 하는 그의 전사가 두려움에 입을 떼지 못하자, 아킬레스는 내뱉는다.
“상(像)은 상일 뿐이다.”
아킬레스는 아폴로신전의 사제 브리세이스와 사랑에 빠진다. 브리세이스는 트로이 왕의 조카딸로 트로이 뭇 남성들의 청혼을 거절하고 독신 사제의 길을 택해 아폴로신을 모시고 살아가는 처녀다. 자신이 모시고 있는 신을 그처럼 무자비하게 칼로 내리쳐버린 아킬레스가 악마처럼 보였을 것은 뻔한 일이다. 그런 아 킬레스가 자신을 범하려하자 브리세이스는 감춰둔 단도를 아킬레스의 목에 들이댄다. 그 시퍼런 칼날을 두려워하지 않은 채 태연자약한 아킬레스가 브리세이스에게 말한다.
“신전에서는 가르쳐 주지 않는
비밀을 하나 알려주지.
신들은 인간들을 질투해.
신들은 죽으려야
죽을 수 없기 때문이지.
신들에겐 마지막 순간이란 게 없거든.
이 세상 모든 것들 보다 인간들이
더 고귀한 것은
인간은 사라지기 때문이야.
넌 지금보다 더 사랑받을 순 없어.
지금 이 순간은 다신 돌아오지 않아.”
그 육체를 가지고 불멸을 이룬 자는 없었다. 천하를 얻은 자도 영원한 생명을 얻지는 못했다. 알렉산더도,
진시황도, 징기스칸도, 나폴레옹도….
그래서 인간은 고통스러워했고, 신을 부러워했다. 그런데 아킬레스가 단번에 신과 인간의 처지를 역전
시켜 버린 것이다. 죽으려야 죽을 수도 없어 불행한 신, 언제나 유한해서 지금 하는 일이 최고의 일이고,
지금이 최고의 시간이며, 지금 만나는 사람이 가장 소중한 사람일수 밖에 없는 인간. 그 유한성의 특징을
그는 보여주고, 지금 이 순간 신이 누리지 못하는 특혜인 죽음이 온다면 기꺼이 맞이하겠다고 한 것이다.
그 때 브리세이스가 겨냥한 날카로운 칼끝은 아킬레스의 목에 맞닿아 있었다. 그러나 아킬레스는 칼끝을 그대로 둔 채 체위를 바꿔 브리세이스와 사랑을 나눈다. 그런데도 브리세이스는 아킬레스를 죽이지 못 하며, 자신의 신을 내리친 아킬레스를 받아들인다.
자신이 언제나 죽을 수 있다는 것을 알고 싸우며, 바로 그 순간에 전 존재를 거는 치열한 전사는‘불멸’이라는 망상 속을 헤매는 그리스나 트로이의 사제들보다 삶이 명료하다. ‘깨달은 이’(붓다)와‘못 깨달은 이’(중생)의 차이는‘여실지견’(如實之見 : ‘있는 그대로’본다)하느냐, 미망을 헤매느냐의 차이일 뿐이다.
트로이에서 여실지견하는 것은 전사이며, 미망을 헤매는 이는 사제들이다.
브리세이스는 비록 적진에 포로로 잡혀가긴 했지만 아킬레스에 의해 미망에서 깨어났다. 그리고 지금 죽어도 좋을 사랑을 했다.
그러나 브리세이스가 없는 트로이성에서 사제들은 여전히 미망 속을 헤맨다. 아킬레스와 세기의 맞수 인 트로이성의 첫째 왕자 헥토르는 전장을 종횡무진 누비는 탁월한 전사이지만, 전투와 전쟁이 무엇인지 를 안다. 단 한 칼에 자신이, 즉 우주가 사라질 수 있다는 것을.
그는 아킬레스와 맞설 경우 자신이 아킬레스를 이길 수 없다는 것을‘직관(直觀)’하고 있다. 그러나 사제들은 헥토르가 불굴의, 불패의 전사라면서 계속 전쟁과 전투를 하라고 부추긴다. 그것이 아폴로 신의 뜻 이며, 아폴로 신이 지켜주신다면서.
“신(神)이 대신 싸워줍니까?”
헥토르의 말은 현실을 직시하지 못한 채 자신을 환상시하는 철부지 사제들에 대한 한탄이 서려있다. 헥
토르는 아킬레스를 이기지 못한다. 그가 아킬레스에게 밀리는 것은 상대를 제압할 수 있는 근육의 힘이나
속도가 아니다. 그도 전사로서 사제보다 현실을 보는 눈이 뛰어나긴 하지만 아킬레스에 미치지 못한다. 아
킬레스는 너와 나, 이 현실을 냉철한 눈으로 꿰뚫어보고 있다. ‘현실’을 보는 둘의 차이는 트로이성 밖에
서 둘만의 결투에 돌입하기 전 드러난다.
헥토르는 결투 전 아킬레스에게“둘 중 하나가 죽으면, 산자는 죽은 자에 대해 영예롭게 장례식을 치러주자”고 제안한다. 그러나 아킬레스는 말한다.
아킬레스는‘생과 사’에 대해 더 분명히 통찰하고 있다. 생사가 갈리면 몸은 한 공간에 있어도, 영혼은천지현격 차이로 멀어진다.
서로 소통할 길은 없다. 장례 란 산자 스스로를 위무하고 자축하는 잔치일 뿐이다. 죽 은 자는 이미 자신의 길을 가 고 없다.
헥토르가 죽은 뒤에도 사 제들은 깨어나지 못한다. 스 파르타군은 특공대를 숨겨 놓은 거대한 목마를 해안가
에 놔둔 채 군대는 전함을 타고, 모두 후퇴한 척한다.
사제들은 적군이 물러난 것 은 아폴로 신의 은총이자 신의 승리라면서 목마를 신이 준 선물이라고 성 안으로 갖고 들어가자고 한다.
이 때 목마를 불태워버리자고 한 것은 헥토르의 동생 파리스왕자다. 스파르타의 왕비를 꼬여 데리고 오는
바람에 이 전쟁의 빌미를 제공한 바람둥이 파리스왕자였지만, 형이 죽은 뒤 복수를 위해 밤을 새워 활쏘
기를 해왔다.
활쏘기란 정신 집중에 다름 아니다. 그런 집중력을 통해 그 또한 직관할 수 있게 된 것이다. 그 목마가 신의 은총이 아니라 트로이를 파멸로 이끌 수 있는 흉물이라는 것을. 그러나 결국 아폴로신의 도움으로 적 이 다 물러났는데 무슨 소리냐면서 목마를 끌어들인 사제들의 덕분에 그날 밤 난공불락이었던 트로이성은 불타고 한줌의 재로 변한다.
그리고 아킬레스도 이날 밤 브리세이스에게 말한 그대로 인간으로서 가장 큰 특권을 누렸다.
그는 죽었다. 하지만 그는 3천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아킬레스는 사람들의 가슴에 살아있다. 그는 죽은 것인가. 산 것인가. 유한은 무엇이며, 무한은 무엇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