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연종
시인, 내과의사
99 세까지 88하게 살고 딱 2, 3일만 시름시름 앓다가 편안하게 죽자.
지난 연말모임에서 건배를 제안 받은 노 선배의사가 카랑카랑하게 외친 말이다. 한참이나 유행이 지나 이미 식상해진 그 말에 박수까지 치면서 잔을 비웠던 건 대부분 그런 바람을 가슴속에 간직하며 살아 가고 있어서였을 것이다. 인간의 가장 오래된 꿈은 장수가 아닐까 생각된다. 상서(尙書)편에서도 수(壽) 부(富) 유호덕(攸好德) 강령(康寧) 고종명(考終命)을 오복으로 삼고 그 중에서도 장수를 첫 번째 복으로 꼽은 것만 봐도 알 수 있다.
행복지수에서 건강이 차지하는 비중이 점점 더 커지면서 건강에 대한 정보는 이제 홍수처럼 쏟아져 나오고 있다. 건강에 대한 관심이 높아서인지 아니면 이런 모임이 많아서인지 그 날도 많은 술을 마시지 않고 집으로 돌아왔다. 너무 일찍 들어와 조금 서운해서 이었을까. 컴퓨터를 켜고 동문회 홈페이지를 접 속하자 내 눈을 확 잡아끄는 글이 올라와 있었다. 연배가 나보다 스무 해 이상인 건배를 제안했던 노 선 배의사의 글과 그 보다는 몇 해 후배이지만 고혈압 학회 회장을 지낸 바 있는 역시 대학 선배님의 친절 한 답글이 거기에 올라와 있었기 때문이다.
● 노 선배의사의 글
어제 나는 스스로 깜짝 놀랐다. 혈압이 180/110이였다. 환자더러는‘이런 혈압이면 시한폭탄에 가깝다, 풍선이 터지기 직전이다, 그러고도 오래 살기를 바라느냐?’이런 식으로 이야기 했는데 우연일까? 아니지, 재작년 건 검진을 받을 때‘혈압이 조금 높아지는 데요… 라는 말을 들었고, 금년에도 똑같은 말을 들어야만 했다. 설문 지속 가족 난에‘고혈압 형제가 있음’을 표시했더니, 최종 판정에‘귀하는 고혈압위험이 있으니, 정밀 신검을 받 기를 권합니다.’이런 경고가 생각났다. 다시 한 번 스스로 혈압을 재본다. 몇 시간이 지났는데도 그대로다. 아니 다 싶어 슬며시 시제품 항 고혈압 약을 목으로 넘겼다. 5시간이 흘렀다. 변함없다.‘처음 복용이니 그렇겠지’하고 집에 돌아 왔다. 내 윗저고리에 약을 가지고서 말이다. 집식구가‘무슨 약이에요?’하고 묻는다,‘응~ 책상 위에 두었던 것인데 집에다 둘까 하고 가져왔어~’하고 태연히 말은 했지만, 그저 찜찜하다. 나이가 들면 여러 가지 좋지 않은 증상이 있기 마련이지만 찾아 올 것은 어김없이 문을 두드리는가 보다. 내 나이 칠순이라고 한 살 먹고 나니 고혈압이라, 너무 빨리 찾아 왔구나. 아니 조금 늦게 찾아 왔나? 아니 친구가 찾아 왔구나. 반갑다.
고혈압 친구야, 친하게 지내보자꾸나!!
● 대학 선배의 답글
고혈압 다스리기 마음먹기에
고혈압을 친구로 사귀시겠다니 정말 반갑군요.
때론 성깔이 있어 사고도 일으키지만 잘만 다스리면 문제아가 아닙니다. 우리가 약만 먹어주면 아주 유순해져 요. 그것도 하루 한 알이면, 때론 두 알을 달라고도 하지만, 착한 아이처럼 곱게 군답니다. 선배님, 혈압이 높다고 무서워하거나 무관심하면 더욱 깽판을 부릴 녀석이니, 기왕이면 마음 편히 드시고 정말 친구같이 신경 써주세요.
140/90 이하로만 맞춰주면 선배님 모시고 오래토록 행복하게 살 것입니다. 힘내세요.
고혈압과 친구가 되겠다는 노 선배의 지혜는 돋보였다. 그리고 전문가의 답변은 역시 달랐다. 너무 간 단하여 조금 허탈한 기분이었지만, 원칙에 입각한 너무나 명료한 답변이었다. 오직 수치에만 매달려 강 박적으로 대응했던 내 자신에 대한 모종의 훈계 같은 느낌이 들었다. 뒤통수를 치는 듯한 훈계 뒤에 잠 시 멍한 기분을 추스르고 나자 최근 혈압조절이 되지 않아 골칫거리였던 P환자가 생각났다.
그는 미국에서 오래 살다가 귀국해 이제는 한국생활에 대한 염려와 미국에 대한 역 향수병으로 매우 예민한 상태였다. 몇 달 전 처음 방문할 당시에도 혈압은 늘상 170/100mmHg를 상회했다. 그는 고개 를 갸우뚱거리면서도 결코 당황하지 않았다. 오히려 자기의 증세를 소상하게 말하면서 자신에 대한 신 뢰감을 피력했다. 하지만 혈압은 널뛰기 하듯 하늘로 치솟기만 하였다. 스트레스를 피하고 짜게 들지 말고 규칙적인 운동을 할 것이며, 필요시 혈압 약을 증량해야 하고…. 판에 박힌 듯한 내 말은 두서없이 빨라졌지만 뭔가 핵심을 피해가는 느낌이 드는 건 어쩔 수 없었다. 무식한 의사가 신경성 이라하고 자신 없는 의사가 요구사항만 많아지는 것 같은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오히려 평안한 그의 얼굴이 조급해하는 날 위로하는 것 같았다.
그리고 한 달 후, 그가 다시 수첩에 적어온 혈압은 완전 정상이었다. 한 번도 130/80을 넘지 않았다.
그는 귀국할 당시 사이가 좋지 않았던 아들과 며느리가 자기들의 잘못을 뉘우치고 용서를 빌어서 그들 을 용서했지만, 실상 따지고 보면 자기의 고집과 노욕이 빚은 결과라고 했다. 그래서 서로 화해하고 용 서하고 나니 기분도 좋아지고 이제 혈압도 완전히 정상으로 돌아왔다고, 역시 혈압은 마음먹기에 달려  있다며 몹시 기뻐했다. 온화한 얼굴에 여유 있는 미소가 끊이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