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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과 몸과 경험


승한 스님
북한산 중흥사 총무스님


사람이 위대하고 아름다운 것은 혼과 몸과 경험이 있기 때문이다.
혼은 마음, 정신, 의식이다. 그 혼이 없는 몸뚱어리를 상상해보자. 개나 소나 돼지나 말처럼 우리 몸은 한낱 고깃덩어리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그 결과 인류는 이미 멸종해버렸거나 다른 우등한 동식물의 종으로 전락하기 십상이었을 것이다.
몸도 마찬가지다. 몸이 없는 혼은 상상할 수 없다. 그릇이 없는데 어떻게 혼을 담을 수 있겠는가. 어떻게 물을 마시고 밥을 먹을 수 있겠는가.
인간은 이 혼과 몸이라는 두 개의 축으로 굴러간다. 두 축 다 없어서는 안 될 수레바퀴다. 그러나 이 가운데서도 굳이 경중을 따지라면 나는 몸 쪽에 더 손을 든다. 일단은 그릇이 있어야 음식도 먹을 수 있고 엎질러진 물도 쓸어 담을 수 있지 않은가.
경험은 인간이 혼과 몸으로 천하를 경험하고 사는 경험세계이다. 모든 인간에게는 자기가 경험한 만큼의 경험세계가 있다. 그 경험세계 역시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그 사람만의 위대한 값어치이다.
인간이 위대하고 아름다운 것은 그처럼 혼과 몸이 있고, 그 혼과 몸이 한 덩어리 유기체가 되어 천하를 경험하고 사는 경험세계가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인간은 이처럼 위대하고 아름다운 혼과 몸과 경험 때문에 타락하고 있기도 하다. 그 혼과 몸과 경험으로 있고 없음을 따지고 좋고 싫음을 따지며 욕구를 충족시키기 위해 안으로는 고통을 겪고 밖으로는 전쟁을 일으키는 것이다. 그 타락의 시작이 바로 번뇌고 번뇌구조고 번뇌구조의 속성이다.
인간의 번뇌구조와 속성은 아주 간단하다. 있다-좋다-싶다-썅과 그로 인해 빚어지는 불만사고다.
먼저 ‘있다’는 실체사고다. 근根·경境·식識 삼사를 통해 ‘있다’ ‘없다’ 라는 실체사고를 하는 것을 말한다. 근은 안·이·비·설·신·의의 육근이고, 경은 육근이 감각하는 색·성·향·미·촉·법의 육경이며, 식은 이 육근과 육경이 만나 빚어내는 여섯 가지 식, 즉 안식·이식·비식·설식·신식·의식의 육식이다.
인간의 모든 활동은 이 근·경·식 삼사로 이루어지고 있다. 이 가운데서도 가장 문제가 되는 것은 무엇인가 ‘있다’고 보는 실체사고에 있다. 모든 번뇌는 있다-없다 하는 실체사고로부터 시작된다.
그 ‘있다’는 실체사고는 바로 ‘좋다’ ‘나쁘다’는 가치사고로 이어진다. 실체사고와 가치사고는 동전의 양면이다. ‘있다’ 하는 순간 모든 사물과 상황은 ‘좋다-싫다’는 가치사고로 바로 이어지기 때문이다.
실체사고와 가치사고가 동시적으로 일어나는 순간 인간의 타락(추락)은 시작된다. 내게 좋은 것은 갖고 싶고 불리한 것은 밀어내고 싶은 마음이 생기는 것이다. 이것이 ‘싶다’ 번뇌구조로 욕구사고에 해당한다.
불행은 여기서부터 시작된다. ‘싶다’라는 욕구사고가 고통과 전쟁을 불러오는 것이다. 내가 갖고 ‘싶은’ 것이 내 생각대로 순조롭게 잘 이뤄지면 다행인데 대부분의 ‘싶다’ 욕구는 내 뜻대로 충족되지 않기 때문이다. 때로는 돈이 없어서, 때로는 상대방이 줄 마음이나 팔 마음이 없어서 내 욕구는 좌절되거나 충족되지 않는 것이다. 이때 일어나는 것이 ‘썅’ 번뇌다. 내 욕구가 채워지지 않음에 따라 ‘썅’ 하고 분노가 일어나게 된다.
인간의 불만사고는 이 대목에서 발생한다. 갖고 싶은데 욕구가 충족되지 않으면서 ‘썅’ 하게 되고 그 속에서 불만사고가 잉태되는 것이다. 불만사고가 잉태되는 순간 우리 마음은 안으로는 고통을 받고 밖으로는 싸움을 일으키게 된다. 모든 전쟁의 역사는 바로 이 불만사고 때문이다. 언제 어느 곳에서나 내 ‘싶다’ 욕구가 내 ‘싶다’ 욕구대로 순조롭게 잘 이뤄지면 좋은데 대부분의 경우 그러지 못하는 것이다. 본격적인 지옥은 이때부터 시작된다.
우리 삶이 불행해지는 것도 바로 이 불만사고 때문이다. 우리 의식 공간 한 가운데 있다-좋다-싶다-썅으로 인해 생겨난 불만사고가 자리 잡고 있으면서 우리들의 행불행 99퍼센트 이상 좌우하고 있는 것이다. 다시 말해 우리들은 이 불만사고의 노예가 되어 사는 것이다.
거개의 사람들은 그것이 인생인 줄 알고 산다. 그것이 삶의 순리, 삶의 흐름, 삶의 요체인 줄 알고 산다. 그러나 조금만 눈뜨면 그런 삶이 얼마나 지옥 같은 삶이고 고통스런 삶이고 타락한 삶인 줄 알게 된다.
‘눈뜸’의 요체는 아주 간단하다. 그런 자기 자신에 깨어 있으면 된다. 그런 자기 자신에 눈뜨고, 불만사고를 만족사고로 바꿈으로써 어떤 상황과 조건과 환경 속에서도 행복하게 사는 것이다. 만족사고야말로 우리 삶을 송두리째 구원해낸다.
깨어 있기는 지금 현재 이 순간에 머무르는 것으로부터 시작된다. ‘히어 앤 나우(here and now)’에 머물며 지금의 그 상태를 그대로 받아들이고, 그대로 느끼며 나의 본래자리, 불성의 자리, 자성의 자리, 청정의 자리, 첫 출발점의 자리, 텅 빈 의식의 공간으로 되돌아오는 것이다. 그리고 실체 시 했던 ‘있다(실체사고)’와 ‘좋다(가치사고)’로부터 자신의 에너지를 거둬들이는 일이다. 마음공부가 필요한 것은 그 때문이다.
하지만 마음공부가 절로 되는 건 아니다. 약간의 훈련이 필요하다. 우리가 절에 다니고 교회에 다니고 성당에 다니고, 영성프로그램을 찾아다니며 기도하고 절하고 수행하며 할렐루야를 찾고 아미타불을 찾는 것도 사실은 행복한 삶을 위한 마음공부 훈련이다.
있다-좋다-싶다-썅-불만사고를 척결하는 방법은 크게 네 가지로 구분된다. 삶이 지족知足함을 아는 ‘지족명상’과 나라고(내 것이라고) 할 만한 것이 없다는 ‘비아非我명상’과 분노를 정화하는 ‘나지사(구나 겠지 감사)명상’과 욕구의 실체를 파악하고 전환시키는 ‘죽음명상’이다.
지족명상은 그야말로 지금 현재 이루고(기성), 이미 갖고 있는 것(기존)만으로도 내가 최고로 행복하다는 사실을 확인하고 누리는 명상이다. 햇빛과 공기와 물은 물론 이미 내가 갖고 있는 손과 발과 팔과 입과 눈과 귀와 몸뚱어리만으로도 충분히 행복할 뿐만 아니라 내 힘으로 산 자동차와 집과 텔레비전과 컴퓨터는 물론 아내와 자식과 가정과 하고 있는 일만으로도 충분히 만족스럽고 행복하다는 사실을 확인하고 기쁘게 누리는 것이다. 우리가 불행하다고 생각하는 것은 이렇듯 우리가 이미 갖고 이미 이룬 것에 대해서는 눈뜨지 않고 앞으로 갖고 싶고 이루고 싶은 것에만 눈독을 들이며 징징대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가 행복해지기 위해서는 이미 갖고 이미 이룬 기존기성에 먼저 눈뜬 뒤 앞으로 이루고 앞으로 갖고 싶은 것을 목표점으로 삼아 구현해나가면 된다. 또 그렇게 행복한 마음으로 일을 구현해나가야 구현목표도 쉽게 성취된다. 징징 짜는 마음으로 일하는 것과 행복한 마음으로 날마다 즐겁게 일하는 것 중 어느 것이 성취도가 더 빠를지는 묻지 않아도 답이 뻔하다.
비아명상은 실체사고를 없애는데 아주 좋다. 나를 비롯한 모든 존재들은 독립된 실체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인연에 의해 존재하는 연기적 존재임을 아는 것이다. 우주에 존재하는 모든 존재들이 다른 존재들과 서로 인연을 맺음으로써만 존재할 수 있다는 것에 눈뜸으로써 그동안 개채시하며 가치평가를 해 왔던 모든 존재들이 무아요 공이요 비아임을 아는 것이다. 그 중에서도 실체사고의 왕초인 ‘나’를 척결해버림으로써 나머지 모든 실체사고를 한꺼번에 정화해버리는 것이다.
죽음명상은 내가 지금 바로 죽는다고 생각하고, 그 죽음을 방해하는 것들이 무엇인가를 찾아내 그 내용물들을 음미하고 관조하면서 ‘무엇 무엇 때문에 내가 절대로 죽을 수 없다’는 문장을 ‘이렇게 이렇게 할 수 있음으로 내가 얼마든지 죽을 수 있다’는 문장으로 전환함으로써 자신의 마음속에 있는 탐심을 찾아내 정화하는 것이다. 그렇게 하다보면 지금 자신의 욕심(탐욕)의 실체가 무엇인지를 발견해내고 그 탐욕을 척결하는데 아주 좋은 명상법이다.
‘나지사(구나 겠지 감사)명상’은 스승이신 용타 큰스님께서 개발해내신 명상법으로 분노 척결에 아주 좋은 명상이다. 천하의 모든 상황, 나를 화나게 하는 모든 상황을 사진 찍듯이 나와 객관적으로 멀리 떼어놓고 ‘무엇 무엇 하는구나’ 하면서‘그럴만한 사정이 있겠지’ 하며 역지사지하는 순간 분노의 90퍼센트 이상은 정화되어버린다. 거기다가 ‘그만하니 얼마나 다행하고 감사하냐’ 하고 감사하는 마음을 덧붙이면 분노가 정화되다 못해 연민의 정까지 솟아오르면서 나를 화나게 했던 사람이 따스하게 안아지기까지 한다.
페스탈로치는 인간에게 주어진 최고의 선물은 사색이라고 했다. 사색이 없는 인간은 인생을 소모하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인간에게 혼과 몸이 주어진 것은 몸으로 살기는 살되 혼으로 사색하며 살라는 뜻으로 몸에 혼을 담아준 것이다.
내가 위대하고 아름다운 인간으로 살 것인가 말 것인가는 그 혼과 몸으로 얼마나 자신의 삶에 눈뜨고 사색하며 세상을 경험하고 사느냐에 달려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