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재호
후애마이(Who am I)연구소 소장
어떤 문제이든 ‘선행’이라는 처방전이 특효약입니다.(cafe.daum.net/sun-order)
‘불교의 핵심은 ‘마음’이라고 하는 이야기를 많이 들어 봅니다. 그래서 ‘마음’을 주제로 집필된 책이 무척 많습니다. 아마도 ‘마음’이라는 것은 사전적 의미로 단언하기 힘들기에 그토록 많은 책자가 탄생했을 것이라고 생각 됩니다.
‘마음’은 어디에서 활동하고 있을까요? 뇌 속에서? 아니면 심장에서? 음… 그것도 아니면 어디?
오래 전부터, 서양에서는 (또는 관련 학계에서는) 마음이 근육을 움직인다고 믿어 왔습니다. 단순하게 추측한 것이 아니라 수 많은 실험을 통해서 그렇게 정의를 내려왔습니다. 즉, 근육을 움직이고자 생각을 한다면 그 사이에는 ‘마음’이라는 것이 관여한다는 것입니다. 예컨대, 손을 이용하여 연필을 깎는다고 했을 때, 오묘한 손 동작을 위하여 움직이는 수 많은 근육과 관절들을
‘뇌’가 일일이 통제하는 것이 아니라, 연필을 깎기 위한 (연습된) 행위는 근육 자체에 메모리(저장) 되어있기 때문에, ‘뇌’에서는 연필을 깎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면 손 근육들이 생각과 동조되어 연필 깎는 행위가 완성 된다는 것이지요. 이때, 만일 연필을 깎기 싫은 상황에서 억지로 연필을 깎게 되면 손이 칼에 베이는 등의 실수를 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실수는 연필을 깎기 위한 마음 작용에 (연필을 깎기 싫다는) 감정이 유입되어 연필을 깎는 행위가 온전하게 완성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관련 학계의 이와 같은 ‘마음’의 정의를 불교적 관점에서 어떻게 평가 할 것인가는 차치하더라도 ‘마음’이라는 것이 우리의 행동에 꽤나 깊이 관여하고 있음은 이미 알고 있는 사실입니다.
‘마음’은 세포에 스며 있는 것일까?
‘마음’이라는 용어는 꽤나 추상적이어서 그런지 사실상 명확하게 정의되지 못하는 것 같습니다. 많은 문헌에서 (혹은 경전 등에서) ‘마음’을 설명하거나 비유 한 것들을 볼 때, 공통점이 있습니다.
거의 모든 문헌에서 공통적으로 사용 하는 용어는 ‘마음이 스며 든다’,  ‘마음이 젖어 든다’,  ‘촉촉한 마음’ 등으로 표기하는 것으로 보아 ‘마음’이란 우리 신체 어디엔가 스며(젖어)드는 형태로 존재한다고 봐야 할 것 같습니다.
예컨대, 불교에서 중생들의 미련함을 표현하는 습習(젖을 습)은 반연攀緣으로 살아가며 익힌 옳지 못한 버릇들이 세포 하나하나에 스며들어 있으므로 수행을 통하여 모두 씻어 내야 한다고 표현한 것과 딱 맞아 떨어집니다. 즉, 중생의 무명을 낳는 몹쓸 버릇들은 모두 마음에 젖어 있는 것이고, 서양 관련학계의 모든 근육(세포)에 ‘마음’이 녹아 들어가 있다는 실험 결과가 불교에서의 ‘습’과 다를 바 없다는 생각을 해 봅니다.
마음이란?
그렇다면 마음은 모든 행동의 근원이겠습니다.
마음이 온 근육에 스며 있다면, 얼굴 근육에도 마음이 녹아 들었겠군요?
네, 맞는 것 같습니다.
얼굴만 보면 그 사람의 마음 됨됨이를 알 수 있지 않습니까?
 
마음이 얼굴에 그대로 나타나니 마음 관리를 잘 해야겠습니다.
즉, 마음씀씀이는 ‘관상’을 바꿔버립니다.
저잣거리에는 이런 말이 있습니다.
어떤 식당에 지독히도 손님이 안 오는데, 안타깝게도 그 원인을 식당 주인만 모른다는 것입니다. 외부에서 그 식당을 바라보는 사람들은 모두 손님이 가지 않는 이유를 아는데 말이죠.
(맛이 없던지, 천정 구석에 거미줄이 있던지, 주인이 청결해 보이지 않던지 등등)
하지만, 주인은 오로지 손님 오기만을 기다릴 뿐 자신을 분석할 생각은 하지 않습니다.
우리의 마음 관리도 꼭 같은 것 같습니다.
자신의 마음은 이미 얼굴에 쓰여져 있어서 보는 사람이 다 눈치채고 있는데, 무슨 말과 행동을 한들 믿겠습니까? 오히려 안 하느니만 못할뿐더러, 더 나아가 위선자로 보겠지요. 식당의 예처럼 그 사람이 어렵게 사는 이유를 남들은 다 아는데 본인만 모르는 거죠.
그래서… 우리는 자신의 마음을 볼 수 있는 사람이 되어야겠습니다.
마음의 변화는 피의 성분마저 바꾸어 놓는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됩니다. 마음이 세포에 녹아 들려면 우선 피의 성분부터 바꾸어 놓지 않겠습니까?
예컨대, 자꾸 짜증내면, 피 안에는 독毒이 자꾸 쌓이고, 죄 없는 간장肝腸은 그 독을 없애려 바쁘겠죠. 그렇게 녹초가 된 간장으로 인하여 얼굴에는 이런 저런 돌기가 생겨나고 잡티가 생깁니다. 아무리 마사지를 받고 피부 미용을 해도 소용 없는 일입니다.
성형을 하고, 박피술을 받고, 온갖 미용을 한 들 소용 있나요? 간장이 이미 상하고 피에는 독이 기본으로 차 있는데…. 즉, 곧 다시 원위치 됩니다. (반드시)
그것이 바로 마음입니다. 마음의 결과로 만들어진 결과들입니다.
불교에서 표현하는 마음
 ‘성정性情’
마음은 성정性情으로 풀이 됩니다. 즉, 불교에서는 본디 사람의 마음(心)은 성性과 정情으로 이루어졌다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성性 : 마음이 난다, 마음이 생겨난다. 마음의 작용이 일어난다.
즉, 한 생각이 시작 된다는 의미로서 모든 일이 ‘인연’의 결과라고 하듯 ‘인因’에 해당됩니다.
시작이요, 태동이니까요. (직접적인 원인을 말합니다.)
정情 :마음 심과 푸를 청靑이 함께 있네요.
푸를 청은 붉은 돌(丹)사이에 태어난(生) 꽃은 더욱 푸르러 보인다는 의미로서 ‘푸를 청’이지만, 여기서는 붉은 돌은 물감에 물들인다는 의미이며, 생生과 조화를 이루어 물들기 시작한다는 의미로써 어떤 함(爲)이 시작된다는 의미입니다.
즉, 성정에서의 정은 ‘인연’에서의 연緣을 뜻합니다. (간접적인 원인을 말합니다.)
따라서 마음이 성정性情이라 하는 것은, 한 마음이 시작되면(성) 그로 인한 2차 작용으로 ‘습’이 시작되어(정), 온 세포에 녹아 든다는 의미로 받아들여 봅니다.
즉, 어떤 외부 자극으로 인하여 발끈하는 마음이 생긴다면(성) 그로 인한 ‘화’로 인하여 피는 독으로 물드는(정) 과정을 겪는다는 것이지요. 그리고 그것이 반복되면(습習, 익힐 습, 젖을 습) 그것은 습관習慣이라는 형태로 내 몸 안에 자리 잡는 것입니다.
불교에서 마음을 성정으로 표현한 것은 (위 설명에서 보신 바와 같이) ‘인연법因緣法’하고도 그 맥을 같이 합니다. 만일 어떤 자극이 있을 때(인) 그것으로 인하여 2차적인 행동을 하면(연) 당연히 반작용이 나에게 돌아 오겠지요. 하지만 자극을 분석하고 받아들여, 인으로써 끝내버린다면 연은 없을 것이요, 내게 돌아오는 반작용은 당연히 없을 것입니다. 즉, 사회 활동에 마찰이 훨씬 적어 진다는 의미겠습니다.
마음이 ‘성정性情’으로 표현되는 이유
성性이, ‘성품’을 뜻하는 이유는, 시작이라는 의미로서 그 태도 및.순간 그 자체.특성을 의미하므로 성품이라 한 것입니다. 아울러, 마음의 시작이라는 것은 아직 어떠한 마음의 작용이 일어나기 전, 어떠한 이유로든 마음의 작용이 일어나기 전 순수한 상태, 그 마음이 무엇인지 알 수 없는 끝. 즉, 알음알이의 끝(이며 시작)인 것입니다. 이를 테면 마음의 시작이며 정점(쩜)인 것이죠. 그렇게 생기는 마음. 그 자체가 삶에 물들기 시작하면서(정情) 마음의 작용이 시작된다는 것입니다.
마음의 작용은 어떻게 이루어지는가?
보고, 듣고 그리고 맛봄으로써 그에 상응하는 연쇄적 반응으로 마음의 작용이 시작됩니다.
무엇을 보았는가에 따라 마음 작용의 방향과 범위가 정해지며
무엇을 들었는가에 따라 마음 작용의 방향과 범위가 정해지며
무슨 맛을 보았는가에 따라 역시 마음 작용의 방향과 범위가 정해집니다.
이렇게 정해진 경험과 지식이라는 알음알이가 마음에 근간을 이루며 새로운 ‘인’이 시작됩니다.
(알음알이로 정해진 기준을 기반으로 말입니다.)
즉, ‘인’으로 자리잡은 것은 생각의 기준이 되므로 이렇듯 보고, 듣고, 맛 본 것을 기반으로 다음 행위가 이어집니다.
이 집보다 저 집이 크네
저 집보다 이 집이 맛있네 등등
예컨대, 무엇을 보고 들었는가? 그리고 그 정보들을 어떻게 이해/소화하였는가에 따라 다음 작용이 시작됩니다. 이쯤 되면 인연의 태동은 마음에서 비롯되는 것이라 볼 수 있지 않겠습니까?
‘인’으로 시작하여 ‘연’으로, 그리고 그 ‘연’으로 인하여 새롭게 생겨난 ‘인’으로 또 다른 고민을 하는 세상사. 이 모든 것의 원천은 ‘마음’입니다.
마음의 성性을 깊이 관찰하면 자신의 마음의 작용을 관찰할 수 있습니다.
그 마음의 변화를 추적하고 모니터링하여 그릇된 방향으로 흐르는 자신을 바로 잡아야 합니다.
현미경을 통하여 작은 것을 볼 수 있고
망원경을 통하여 먼 곳을 볼 수 있듯
자신의 마음을 자세히 보려면 어떤 도구가 필요할는지 모릅니다.
그러한 도구는 바로 자신의 ‘의지’입니다.
굳건한 의지를 바탕으로 자신의 마음작용을 지켜보고 모든 인식 작용을 통제하여야 합니다.
내가 그릇된 행동을 하기 이전, 우리는 내 마음의 변화와 마음이 원하는 것을 알아챌 수 있습니다.
그리고 마음의 흐름이 적법한지 여부 또한 바로 알 수 있습니다.
그렇게 하여 내 행동거지 하나하나를 단속할 수 있습니다.
‘내 마음 나도 몰라’ 식의 삶은 평온한 삶을 가져오지 않습니다.
처음은 어렵지만, 연습과 관심을 통하여 마음의 작용을 관찰할 수 있습니다.
Hyun-jaeho@daum.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