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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불교의 청사진(18)

성운星雲 스님
대만 불광산사 개산조


<지난호에 이어서>


15. 육락관育樂觀 : 정명지도正命之道
인간이 생활하며 오로지 일만 할 수도 없고, 한결같이 수행만 할 수도 없다. 식물이 성장하는 데는 공기, 수분, 온도 등의 인연이 고르게 제공되어야 하듯, 인간의 생활도 마찬가지다. 그러므로 사람은 매일 휴식만 취할 수는 없다. 항상 긴장 속에서 입고 먹고 살고 움직이는 기거동작起居動作만을 할 수도 없다. 수행하는 사람에게 교육성 오락이 필요한 것과 마찬가지로, 사람은 세 끼 배불리 먹는 것과 더불어 오락이나 취미를 통한 전신생활의 조절도 필요한 존재이다.
예를 들어 참선하는 사람은 좌선을 마친 후, 포향(.香: 자신의 오른쪽을 부처님을 향하게 하여 도는 예법), 배원(拜願: 소원을 빔)을 해야 한다. 이것들이 모두 신심의 오락이다. 불문에서는 매주 하루는 향을 올리지 않는 시간이 있다. 심지어 매일 세 번의 공양 중 저녁 공양 시간에는 아침이나 점심 공양처럼 가사를 걸치고 공양주를 크게 독송하지 않는다. 이 공양을 ‘방참(放參: 일시적으로 수행을 생략하여 수행승에게 자유 시간을 줌)’이라 한다.
일부 수행자들 중에는 곳곳으로 운수행각과 참방, 산사 참배(朝山)를 하는 사람도 있고, 자연을 동경하여 홀로 거주하며 참선과 선정을 하는 사람도 있다. 해, 산, 물, 나무, 경치, 부처, 광명 등을 마음에 떠올리며 관찰하는 『관무량수경觀無量壽經』의 16관법觀法 또한 수행이란 이름을 빌린 오락 가운데 하나이다. 극락정토에서는 새벽마다 갖가지 예쁜 꽃을 꽃바구니에 담아 십만 억 불국토의 부처님께 공양 올리거나, 평소 일곱 겹의 늘어선 나무와 일곱 겹의 난간과 팔공덕수八功德水가 가득 찬 연못을 한가로이 노닐며 새들이 맑은 소리로 법을 설하는 것을 듣고, 부처님과 법과 스님들을 생각하는 것 등 어느 하나 즐거운 일 아닌 것이 없다.
과거 총림에서는 승려에게 바둑 두는 것을 허락했고, ‘성불도成佛道 놀이’를 만들어 즐겼다. 성불도 놀이는 나·무·아·미·타·불이란 여섯 글자가 새겨진 주사위를 굴려 십법계 사이를 움직이는 놀이다.
이 놀이를 통해 불교 상식을 증진시키고 교육적인 오락도 즐기며, 도반과의 우의도 높일 수 있다.
바둑 외에도 총림 안에서 종종 이루어지던 다도와 서예, 심지어 티베트 불교 스님들의 전통적 토론 방식인 최라(Chora, 辯經)와 일반 사경, 조각, 회화, 무용, 범패 등의 예술이 모두 교육적 의미가 깊고 생활 속에서 즐길 수 있는 것들이다.
사람의 하루는 24시간이다. 먹고 자고 일하는 시간 외에 적당한 오락을 통해 생활을 조절해나가는 것은 지극히 중요한 일이다. 일반 사회의 오락은 음주와 가무에 중점을 두지만, 불교에서는 자연계를 중시한다. 조과 선사는 나무 위의 둥지에서 머물렀고, 원통 선사는 바위 동굴에서 지냈으며, 대매 선사는 연잎으로 옷을 해 입고 송홧가루로 밥을 지어 먹었다고 한다. 얽매임이 없으니 얼마나 한가롭고 자유로운가! 또한 선사들은 풀을 뽑고, 씨를 뿌리고, 밭을 갈고, 소나무를 심으면서 신심을 전원 속 자연과 하나 되게 하고, 안이비설眼耳鼻舌은 여유롭게 심해心海에 두어 청정한 선법禪法의 즐거움을 누리라고 당부했다.
이 밖에도 불교가 중국에 전래된 뒤 명산대찰名山大刹 참배, 사찰 순례, 좌담 친목 등도 무척 중시되고 있다. 이런 활동을 통해 더 널리 선연을 맺고 견문을 넓힐 수도 있기 때문이다. 이 또한 불교의 취미 생활이다.
현대 학교교육에서는 ‘지智·덕德·체體·군群·취미趣味’가 똑같이 중요하다고 주장한다. 사실 불교는 예로부터 다섯 가지 닦음(五育)을 똑같이 중요하게 여겼다. 법당에서의 공수共修 법회는 덕德을 닦고, 강당에서의 경전 듣기는 지智를 닦고, 산비탈에서의 울력은 체體를 닦고, 승단의 육화합승이라는 것은 군群을 닦고, 조각·회화·범패·찬송은 미美를 닦음을 강조한 것이다.
이 밖에도 불교는 위에서 서술한 것처럼 교육과 오락을 합한 수행 법문을 많이 가지고 있는데, 대략 다음 여섯 가지로 나눈다.


(1) 체육활동 : 포향砲香, 조산 朝山, 운유雲遊, 불교무도舞蹈, 권술拳術
(2) 음악 : 범패梵唄, 불가佛歌, 합창, 법기法器, 국악國樂, 속강俗講
(3) 서예 : 붓글씨, 사경, 회화, 조각, 소상塑像, 바둑
(4) 꽃·차 : 꽃꽂이, 다도
(5) 울력 : 출파出坡, 농경農耕, 공선工禪, 고행, 요리
(6) 수지受持 : 심사(尋師: 스승을 찾아감), 논도(論道: 도를 논함), 염불, 선열禪悅, 법회法會, 지관止觀


사람이 생활하면서 물질적으로 입고 먹을 것이 풍부한 것 외에도 예술적 생활의 멋과 타인에게 봉사하는 멋, 그리고 한가롭게 취미 생활을 즐기는 멋이 있어야 한다. 재가신도 여러분은 앞으로 어떤 취미 생활을 계획하고 있는가? 욕심을 부리지 않고, 정신을 못 차릴 정도로 주색에 빠지지 않으며, 바른 오락과 취미라면 다 해도 된다. 새벽에 운동하기, 잠자기 전 음악 감상, 정해진 낮 시간에 경행徑行과 산책 등도 좋다. 휴일에는 친한 친구 몇 명과 여행을 하거나 차를 마시면서 수다를 떨거나 사경, 요리, 악기 연주 등을 함께 하는 것도 좋다. 친구끼리 댄스파티나 모임에 참석하는 것도 안 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이런 오락 활동에도 조건과 주의사항이 있다.


(1) 참여하는 인원은 반드시 선한 사람이어야 한다.
(2) 참여하는 시간을 조절해야 한다. 예를 들어 하루 24시간 중 일은 8시간, 잠은 8시간, 그 밖의 8시간은 식사, 샤워, 오락 등을 균등하게 배분해야 한다.
(3) 활동 장소 안전에 유의해야 한다. 사회에는 뜻밖의 사건이 자주 발생함으로 외출 시에는 안전에 주의해야 한다. 불장난, 도박, 만취 등은 올바른 놀이 생활이 아니니 피해야 한다.
(4) 활동에는 부부가 함께 참석한다. 서로에게 공통된 친구와 공동된 화제가 생기는 것은 물론, 감정의 일탈을 피할 수 있다.


명·청 시대 이래로 불교는 대부분 산중사찰에서 고요한 마음으로 심신을 수행하는 정수精修를 위주로 하였기에, 사람들에게 늘 속세를 벗어난 것 같은 고요한 느낌을 주었다. 보통 사람들은 불교가 ‘사대개공四大皆空’이니 ‘고공무상苦空無常’이니 말하니, 불도를 공부한 뒤에는 반드시 고생을 감내하고 사람들과 동떨어진 생활을 해야 진정으로 불도를 이룰 수 있다고 여겼다.
사실 불교는 생활과 무척 밀접하고 활기차며 생기 넘치는 종교이다. 불교는 일상생활을 무척 중시한다. 가고 머물고, 앉고 눕고, 옷을 입고 밥을 먹고, 땔감을 나르고 물을 긷는 등 어느 것 하나 불법 아닌 것이 없다. 그러므로 인간불교의 육락관育樂觀에서는 불법을 배우려면 불경에서 탐구하고 선지식을 위해 참방하는 것도 필요하지만, 일상생활 속에서 먹고 입고 자는 행동 하나하나에도 불법이 들어 있음을 잊지 말아야 한다고 강조한다. 생활 속에서 체득과 실천에 좀 더 마음을 쓴다면 ‘나는 법락이 있으니 세속의 즐거움이 즐겁지 않다’는 행복한 인생을 누릴 것이다.


16. 상경관喪慶觀 : 정견지도正見之道
인간의 삶은 기쁨 아니면 슬픔이다.
오래된 관념에 비추어 보면 태어나는 것은 기쁨이요, 죽는 것은 슬픔이라 할 수 있다. 사람이 태어날 때는 아들이건 딸이건 모두 축하를 한다. 그러나 일단 수명이 다하면 울부짖으며 통곡하고 말할 수 없는 슬픔에 잠긴다. 사실 인간에게는 태어나는 순간 이미 죽음이 필연적으로 결정되어 있다. 그러므로 사람은 태어나면 반드시 죽어야 하는데 기뻐할 것이 무엇인가! 사람이 죽는 것도 겨울이 가면 봄이 다시 돌아오는 것과 같은데 죽음을 슬퍼할 것은 또 무엇인가! 생사는 둘이 아닌 하나이다. 태어났으면 죽어야 하고, 죽었으면 다시 태어날 것이다. 태어나서 죽고, 죽어서 다시 태어나며 끊임없이 돌고 돈다고 하지 않는가. 그러니 태어남을 기뻐할 것도 없고, 죽음을 슬퍼할 것도 없다.
삶과 죽음은 모든 인간이 반드시 거쳐야 하는 단계인 만큼, 장례와 경축의 예의禮儀는 우리들 생활과 더욱 밀접한 관계가 있다. 특히 중국 사람들은 예로부터 삶과 죽음을 인생의 두 가지 큰 사건으로 보았다.
‘부모가 죽으면 제사를 지내는 것으로 효도를 다한다’는 효친 사상은 지금까지 전해져 오는 중국 고유문화 가운데 칭찬받을 만한 칭찬의 미덕이다. 이것은 불교의 보은報恩 사상과도 부합된다.
그러나 중국 민간의 장례 예의禮儀는 의견이 분분하여 누가 옳고 그른지 알 수가 없다. 합당하지 않은 수많은 관념과 규정은 반드시 정화되고 개선해야 한다. 풍수를 따지고, 택일을 하고, 죽은 지 8시간 이내에는 입관하지 못한다든지, 출빈出殯 시에는 전자음악을 튼다든지, 영구차에 꽃 장식을 한다든지, 유가游街 행렬을 한다든지, 곡묘哭墓를 하는 등은 낭비일 뿐만 아니라 장엄함을 사라지게 만든다. 그러므로 장례 예의를 논하기 전에 우선 바른 견해와 바른 지식을 세워야겠다.
태어나고 늙고 병들고 죽는 것은 인생의 필수 과정이지만, 담담하게 죽음을 맞이하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다. 우리는 항상 ‘임종’이라는 중요한 순간을 간과하곤 한다. 임종은 ‘승천하느냐, 떨어지느냐’의 중요한 분기점이자, 왕생의 여부를 결정하는 가장 귀하고도 결정적인 순간이다. 만약 이때 권속이 대성통곡하면 병자가 슬픔에 휩싸인다. 그것이 쌓이게 되면 올바른 길로 왕생할 수 있는 기회를 잃어버리게 되니 오히려 해가 된다. 이런 연유로 가족 중에 누군가 세상을 떠나면 큰소리로 울거나, 흔들거나, 노잣돈을 쥐어준다든가, 발밑에 제삿밥을 놓아둔다든가, 심지어 곧바로 수의를 입히는 것 등은 마땅하지 않다. 망자의 정신과 의식이 아직 떠나지 않았으므로 오히려 더욱 아쉬워하며 발길이 떨어지지 않게 만들어 고통만 더해주게 된다. 가장 좋은 것은 병자가 위급할 때 스님을 모시거나 도반을 불러 염불을 부탁하는 것이다. 이때 가족도 곁에서 함께 염불하는 것이 왕생하여 극락정토에 나도록 돕는 것이다. 또한 평소 환자가 존경하고 불법에도 능통한 어른을 청해 환자를 위로하고 일심으로 염불하여 정토에 나기를 권하는 것도 좋다.
이 밖에도 현대의 장례는 툭하면 묘지로 쓰는데, 지나치게 넓은 땅을 구입해 사용하니 결국 죽은 사람과 산 사람이 땅을 다투는 형상이 되고 말았다. 불교는 인도에서부터 화장을 주장했다. 화장은 천장天葬, 해장海葬, 임장林葬, 토장土葬보다 좋다. 당시 부처님도 열반에 든 뒤 스스로 삼매의 참 불길로 다비하셨다. 현재 화장한 뒤 유골함을 사찰의 부도탑에 보관하는 것은 인생의 가장 원만한 귀속이라 할 수 있다.
불교의 부도탑은 세속의 납골당과는 다르다. 부도탑은 현실적 문제를 실질적으로 해결하였을 뿐만 아니라, 깊은 신앙적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그러므로 유치원, 양로원, 운수雲水병원 등 많은 자선사업이 있지만, 그중에서도 만수당萬壽堂을 설립해 신도가 유골을 안치할 수 있게 했다. 이렇게 불광산에서는 신도의 생로병사를 두루 돌보며, 불법의 테두리 안에서 원만한 일생을 보낼 수 있게 하고 있다.
장례 예의와 관련해서 다음 몇 가지를 주의해야 한다.


(1) 허영을 부리지 말라: 현대인들은 장례를 다른 사람보다 더 좋게 치르려고 허영심을 부리는 경우가 있는데, 모두 쓸데없는 짓이다. 망자의 마음을 존중하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
(2) 과대 포장하지 말라: 우리는 장례 절차에 얼마를 지출하고, 영구차에 얼마를 쓸지 궁리한다. 그러나 반드시 이럴 필요는 없다. 장례란 지극히 개인적인 가정사일 뿐인데, 대중을 많이 동원할 필요가 뭐 있는가? 장엄하고 슬프고 엄숙하게 치르는 것이 시끌벅적하고 요란하게 치르는 것보다 낫다.
(3) 미신을 믿지 말라: 망자에게는 편안함을 주고 살아 있는 후손은 효를 다하기 위해 장례를 치르는 것이다. 슬프고 애달픈 마음으로 추모하면 되지, 일부러 꾸며낼 필요는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