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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달팽이의 무소유

이진영
시인


춘래불사춘(春來不似春)이다.
뒤뜰의 홍매화와 길섶의 개나리꽃은 제때에 제 꽃을 피워 올렸다.
마당의 살구나무와 앞산의 산벚꽃나무는 벌써 포동포동한 꽃망울을 머금었다.
이렇듯 2008년의 봄과 2009년의 봄은 크게 다르지 않다.
그런데도 어찌된 일인지 나에게는 아직 봄이 온 것 같지 않다. 그 이유가 뭘까.
도무지 나는 그 이유를 모르겠다.
이럴 때 맑은 시 한 방에 우울한 영육을 실어보는 것도 괜찮은 방편이다.
그 시가 가라앉은 영육의 무게를 가볍게 해주는 것이라면 더욱 좋다.
그래서 이 시집 저 시집을 뒤적거리다가 터트린 꽃망울 같은 시 한 편을 찾아냈다.
김신용 시인의「민달팽이」였다.


배꼽 아래서 코끝까지 오르내리는 숨길을 따라 이 시가 오르락내리락 하는 동안 간디
의 말씀 한 마디가 개나리꽃처럼 환하게 나의 달팽이관을 건드렸다.
「나는 가난한 탁발승이오. 내가 가진 거라고는 물레와 교도소에서 쓰던 밥그릇과 염
소젖 한 깡통, 허름한 담요 여섯 장, 수건, 그리고 대단치도 않은 평판, 이것뿐이오.」
1931년 9월 마하트마 간디가 런던에서 열린 제2차 원탁회의에 참석하기 위해 가던 도
중 마르세유 세관원에게 소지품을 펼쳐 보이며 한 말이다.그렇다. 아직까지 나의 봄이
침묵하고 있는 것은 마하트마 간디처럼 가난한 탁발승이 되지 못한 내 탓이었다.
그리하여 내 몸과 마음을 가볍게 비우지 못하고 더 많은 것을 갖고 더 많은 것을 채우
기 위해 남을 탓하고, 주변을 탓하고, 환경을 탓하고, 나라를 탓하며 나와 내 주변을 서
로 사랑하고 살지 못한 옹졸한 내 사랑의 결핍 탓이었다.
더 솔직히 고백하면 채워도 채워도 채워지지 않는 욕망의 드럼통을 위해 더 많은 것을
탐하고, 더 많을 것을 갈구하고, 더 많은 것을 채우려고 허우적거리다가 세상이, 사람들
이, 돈이, 명예와 권력이 내 중심대로 움직여주지 않자 내 마음의 겉볼안이 꽁꽁 얼어붙
은 탓이었다.
그래서 입어도 벗은 것 같은 납의 하나로 운수납행하는 김신용 시인의 민달팽이 한 마
리가 나의 뒤통수를 냅다 갈긴 것이었다. 부처님처럼 등에 짊어진 집마저 세상에 던져


주고 물과 구름처럼 알몸으로 운행하는
민달팽이의 철저한 무소유의 삶이 내
본위의 이기적인 삶에 일침을 가한 것
이었다.
법정 스님은 말했다. 인간의 역사는
어떻게 보면 소유사(所有史)에 다름 아
니라고. 그리하여 보다 많은 자기네 몫
을 위해 인간은 끊임없이 싸우고 있다
고.
맞다. 정말 인간의 소유욕에는 한정
도 없고 휴일도 없다. 승속을 가릴 것
없이 그저 하나라도 더 많이 갖고 하나
라도 더 많이 채우기 위해 인간의 몸과 마음은 한없이 넘실대고 있다. 그리고 그것이 제
뜻대로 되지 않으면 전쟁과 살인 같은 끔찍한 비극도 불사하며 고통의 바다를 허우적거
리고 있다.
그러나 우리 인간은 언젠가는 한번 반드시 빈손으로 돌아간다. 민달팽이처럼 납의의
육신마저 훌훌 벗어던지고 빈손으로 떠나게 된다. 그래서 법정 스님은 더욱 강조했다.
크게 버리는 사람만이 더 크게 얻을 수 있다고. 그리하여 아무것도 갖지 않을 때 우리는
비로소 온 세상을 갖게 된다고.
봄이 왔어도 내게 봄이 온 것 같지 않은 이유는 바로 거기 있었다. 지천명의 나이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나의 소유욕과 집착이 돈과 명예와 권력과 보다 편안한 삶을 원하고
붙들기 위해 불나방처럼 불 속으로 뛰어들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리하여 눈 뜨고도
눈먼 당달봉사가 되어 왜 나에게는 봄이 오지 않나 하고 눈이 빠져라 이미 온 봄을 또
기다리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김신용 시인의 민달팽이는 오늘 나에게 일갈했던 것이다. 그늘마저 소유와 집
착이라며‘치워라, 그늘!’하고 말이다.
김신용 시인의 민달팽이 한 마리처럼 그렇게 세상의 그늘마저 훌훌 벗어던지고 보다
더 가볍고 맑게 살 때 춘래불사춘의 내 봄도 진짜 봄 세상이 되지 않을까.
문득 펼쳐든 시집 위로 따스한 봄볕 한 가닥이 뻗쳐들었다. 집착과 소유의 한기도 꼬
리뼈를 빠져나갔다. 비로소 나에게도 봄이 온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