승한 스님
북한산 중흥사 총무스님
십여 년 전 인디언들의 삶을 다룬 《나는 왜 너가 아니고 나인가》라는 책이 화제가 된 적이 있었다. 류시화 시인이 엮은 이 책은 지금도 스터디셀러가 되어 많은 독자들의 사랑을 받고 있다.
하지만 내 생각은 좀 다르다. ‘나는 왜 나가 아니고 너인가’이다. 그래야 평화가 오기 때문이다. 세상의 모든 전쟁은 너 때문이 아니라 ‘나’ 때문에 일어나지 않던가.
더 쉽게 생각해보자.
내 것이라고 집착하면 괴롭다. 그러나 네 것이라고 포기해버리면 편하다.
내 것이라고 고집하면 답답해진다. 그러나 네 것이라고 베풀어버리면 시원하다.
내 것이라고 주장하면 고통스럽다. 그러나 네 것이라고 주어버리면 기쁘다.
내 것이라고 지키면 싸움이다. 그러나 네 것이라고 양보해버리면 평화다.
나 ‘我아’자를 파자해보면 그 의미가 더욱 선명해진다.
나(我)는 손(手)과 창(戈)으로 이루어져 있다. 내가 나를 지키기 위해 손에 단단히 창을 들고 있는 형상이다.
생존을 위해서는 당연히 창(무기)이 필요하다. 어쩌면 그것은 인간으로 선택된 인간의 선택된 권리인지도 모른다. 우리가 어떤 경우라도 인간이라는 개별자 앞에 ‘나쁜’이라는 수식어를 붙일 수 없는 이유다. 그런데도 ‘나쁜’이라는 수식어가 세상에 널린 이유는 뭘까?
당연히 내가 들고 있는 창(戈) 때문이다. 나도 모르게 내가 손(手)에 쥐고 있는 창(戈)이 나를 나쁘게 만들고 너를 나쁘게 만들고 끝내는 나를 제외한 모든 인간을 나쁘게 만들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부모가 자식을 죽이고 자식이 부모를 죽이는 패륜 사건도 비일비재하게 일어난다.
그걸 똥으로 비유해보자.
내 똥은 나쁘지 않은데 네 똥은 나쁘다. 이유가 뭔가? 내가 내 똥이라는 창을 꼭 쥐고 있기 때문에 내 똥은 괜찮고 네 똥만 나쁜 것이다.
하지만 그 똥을 누가 먹는가? 개가 먹는다. 미생물이 먹는다. 자연이 먹는다. 대지가 먹는다. 너의 똥을 먹고 자란 대지가 열매를 맺고 곡식을 기르고 짐승을 살찌게 한다. 나는 다시 그 열매를 먹고 곡식을 먹고 고기를 먹는다. 그리하여 네가 싼 똥이 언젠가는 달디 단 음식이 되어 내 입으로 들어온다. 그 순간 똥으로 배출되었던 너는 내 안으로 들어와 내가 된다. 네가 싼 똥인 줄도 모르고 나는 너를 맛있게 먹고 있는 것이다.
그럼 너는 어떤가? 너 역시 마찬가지다. 너 역시 내가 싼 똥을 먹고 산다. 서로가 서로의 똥을 똥인지도 모른 채 너는 나의 똥을 먹고 살고, 나는 너의 똥을 먹고 사는 것이다.
그런데도 우리는 나의 똥은 외면한 채 너의 똥만 보고 너를 적으로 생각하고 나의 똥을 지키기 위해 손에 창을 꽉 움켜쥐고 사는 것이다. 나를 먹여 살리는 너(사람, 동물, 자연, 우주)를 향해 창끝을 겨누고 있는 것이다.
세상의 모든 전쟁은 거기서 발생한다. 내가 나를 지키기 위해 손에 꼭 쥐고 있는 창끝에서 싸움은 창조된다.
이제 답은 나왔다. 세상을 평화롭게 하는 방법은 간단하다. 내가 내 손에 꼭 움켜쥐고 있는 내 창만 버리면 된다. 네가 적이 아니고 나인데, 없는 적을 지키기 위해 무기를 들고 있을 필요가 없잖은가.
그런데 그게 쉽지가 않다. 창을 버리면 ‘너’가 와서 ‘나’를 죽일 것만 같다. 내 가족, 내 재산, 내 명예, 내 행복을 짓밟을 것 같다. 내 가족, 내 형제, 내 이웃의 행복을 위해서라도 두 눈 부릅뜨고 나의 창을 움켜쥐고 있어야 할 것 같다. 그래야 ‘너’가 ‘나’를 침략할 수 없을 것 같다. 내 것을 약탈해갈 수 없을 것 같다.
너 역시 너와 너의 가족과 너의 형제와 너의 이웃을 위해 너의 창을 꼭 움켜쥐고 있어야 할 것 같다. 그게 당연하다. 오히려 네 가족과 네 형제와 네 이웃의 안위를 위해 그 창을 더 꼭 움켜쥐고 있으라고 권하고 싶다.
그 대신 이러면 어떨까? 너는 너의 창을 꼭 움켜쥐고 있기로 하자. 나도 내 창을 꼭 움켜쥐고 있기로 하자. 대신 그 창끝을 너는 너에게, 나는 나에게로 향하게 하면 어떨까?
너는 너를 적으로 삼고, 나는 나를 적으로 삼으면 어떨까? 그리고 그 적이 탐·진·치 삼독
三毒을 발동할 때마다 너는 너의 창끝으로 너를, 나는 나의 창끝으로 나를 찌르면 어떨까?
사람들이 종교를 만들고 신학을 만들고 철학을 만들고 윤리학을 만들고 문학과 음악과 미술을 만든 것도 그렇게 서로를 향하고 있는 창끝을 너는 너에게, 나는 나에게 돌리게 하기 위해서 만들어진 장치들이 아닐까?
사람들이 명상을 하고 마음공부를 하고 여행을 하고 책을 읽는 것도 그렇게 ‘너’를 향한 창끝을 서로의 ‘나’에게 돌리게 하기 위해서가 아닐까?
그 중에서도 가장 손쉬운 장치는 내가 네가 되는 것 아닐까? 내가 ‘나’가 아니라 ‘너’가 되는 것이 아닐까?
‘나’인 ‘너’에게 창끝을 들이밀 순 없잖은가? 나인 너를 찌르면 내가 아프므로.
이미 ‘너’인 ‘나’에게 너도 창끝을 들이밀 순 없잖은가? 이미 너인 나를 찌르면 네가 아프므로.
2500년도 전에 석가모니 부처는 이 이치를 훤히 아셨다. 그래서 연기법을 통해 나 이퀄 너라는 관계를 확고하게 밝혀놓으셨다.
이것이 있으므로 저것이 있고(此有故彼有)
이것이 생기므로 저것이 생기며(此生故彼生)
이것이 없으므로 저것이 없고(此無故彼無)
이것이 없어지므로 저것이 없어진다(此滅故彼滅).
《잡아함경 권15》
이 말씀을 이렇게 해독해도 좋으리라.
내가 있으므로 네가 있고
네가 있으므로 내가 있다.
내가 없으면 너도 없고
네가 없으면 내가 없다.
이 이치만 증득하면 해탈은 간단하다. 이 무한우주로부터 방어할 내가 없는데 내 손에 무슨 창이 필요하겠는가? ‘나’가 ‘나’가 아니고 ‘너’인데 이 무한우주로부터 지켜야 할 ‘나’가 어디 있겠는가? 오직 상생相生의 삶만 있을 뿐.
그래서 우리 이제 이미 ‘나’가 아니고 ‘너’인 우리 모두를 위해 이렇게 기도하고 살기로 하자.
“무한우주의 주인인 나는,
우리 모두의 행복해탈과 밝고 맑은 상생의 삶을 위해
나부터 먼저 수심을 잘 해서
마음천국을 이루고,
화합을 잘해서
관계천국을 이루고,
작선作善을 잘 해서
너와 함께 세상천국을 이루고 살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