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경희
도서출판 중도 편집실장
조계종 9대 종정을 지낸 노천당 월하 대종사의 탄신 100주년을 맞아 대종사의 일대기를 소설형식으로 재조명한 책 《영축산에 달 뜨거든》이 출간됐다.
《고승열전》의 작가로 널리 알려진 윤청광 선생이 글을 쓰고 도서출판 중도(대표 신원식)에서 편집과 제작을 맡아 노천문도회(문장 초우스님, 대표 성파스님)에서 발간한 이 책은 1915년 출생에서부터 2003년 열반에 이르기까지 대종사의 일대기를 32장으로 나누어 재조명했다.
글을 열어가는 제1장 「종정이 되신 월하큰스님」에서는 1994년 5월 13일 봉행된 제9대 종정추대식을 중심으로 종정이 되기까지의 과정을 다뤘다.
대한불교조계종의 제9대 종정 월하대종사 -. 그 분은 과연 어떤 스님이셨기에 사상 최악의 위기에 직면한 한국불교가 만장일치로 월하스님을 제9대 종정으로 추대했던 것일까? 그리고 월하스님은 대체 얼마나 큰 덕화德化를 갖추셨기에 만인이 우러러 보는 지고지엄한 종정의 자리에 오르게 되신 것일까? 
- 본문 중에서 -
제2장 「꿈에 그리던 금강산」에서는 일제 치하의 암울한 시대에 태어나 청소년기까지 부여에서 한학을 배우며 살면서 나라 잃은 백성으로서의 설움과 고뇌, 그럼으로써 더욱 크게 다가왔던 민족의 영산 금강산에 대한 그리움을 담았다.
1927년 2월 16일 서울에서는 우리나라에서 처음으로 「경성방송국」이 문을 열고 「JODK」를 호출부호로 라디오 방송을 시작하였는데 이 라디오 방송에 힘입어 1927년에는 유행가 「황성옛터」가 크게 유행, 나라를 빼앗긴 조선 백성의 심금을 울리고 있었다. 그리고 이 무렵 쏟아져 나온 각종 잡지들이 약속이나 한듯 너도나도 「금강산 특집」을 꾸며 빼앗긴 조국 강산, 그 가운데서도 가장 빼어난 금강산에 대한 백성들의 관심을 불러 일으킴으로써 은연중 조국의 얼과 조국 강산에 대한 자랑과 긍지를 북돋아주고 있었다.
- 본문 중에서 -
 제3장 「금강산 장안사에도 왜색물결」에서는 부여에서 금강산까지 가는 과정과 드디어 보게 된 금강산에 대한 감회 등을 다뤘다.
금강산 전기철도에서 금강산유람객들이 한꺼번에 쏟아져 역 밖으로 나오자 내금강역 앞마당은 그야말로 갑자기 시골장터처럼 시끌벅적해지기 시작했고, 저마다 손님을 자기네 여관으로 끌어가려고 아우성을 치는 통에 ‘여기가 과연 깊고 깊은 금강산, 그 중에서도 내금강이 맞는가’, 어리둥절할 지경이었다.
- 본문 중에서 -
제4장 「장안사에서 유점사로」에서는 금강산을 본격적으로 유람하면서 느낀 금강산에 대한 소회와 유점사에 대한 감회 등을 다뤘다.
어둑어둑해진 길을 더듬어 여관으로 내려오면서 희중은 새로운 세계를 향해 눈을 뜨기 시작했다. 그동안 먼발치에서 구경삼아 바라보기만 했던 사찰과 스님과 독경소리가 어인 일인지 희중의 마음을 뒤흔들기 시작했으니, 그것은 어쩌면 전생에 맺은 불연佛緣 탓이 아니었을까.
- 본문 중에서 -
제5장 「이 깊고 오묘한 가르침」에서는 유점사를 구경하고 내려와 머물던 여관 주인으로부터 받은 《계초심학인문誡初心學人文》을 읽으면서 출가에 대한 결심을 하게 되는 장면 등을 다뤘다.
윤희중은 어느덧 《계초심학인문》이 이끄는 대로 자신도 모르게 한걸음, 또 한걸음, 이 깊고 오묘한 가르침을 통해 유점사 절 마당 안으로 들어가고 있는 셈이었다. 충청도 부여에서 금강산 유람차 들어온 시골 청년 윤희중의 마음을 불가로 이끌어 들인 유점사는 과연  어떤 절이었기에 유가儒家의 길을 걷고 있던 한 시골 선비의 발길을 붙잡았던 것일까?
- 본문 중에서 -
제6장 「금강산까지 찾아온 아버님」에서는 유점사 주지스님을 만나 출가를 허락 받고 행자생활을 시작하는 과정과 금강산 유람을 다녀오겠다고 길을 나선 뒤 몇 달이 되어도 나타나지 않는 아들을 찾아 유점사까지 온 아버지와의 만남 등을 다뤘다.
“머리를 깎고 출가해서 중노릇을 제대로 하자면, 평생 장가도 못가고, 평생 머리도 기르지 못하고, 평생 술도 마시지 못하고, 평생 좋은 옷 한 번도 입어보지 못하는데, 그래도 중이 되고 싶으신가?” “예 스님.”
 - 본문 중에서 -
제7장 「다시 또 금강산으로」에서는 아버지를 거역할 수 없어 고향으로 돌아왔지만, 한 번 굳어진 출가에 대한 결심을 꺾을 수 없어 고뇌하다 다시 출가를 감행하기까지의 과정을 다뤘다.
첫 번째 출가 시도가 실패한 가출로 끝난 뒤 한동안 집안에 틀어박혀 유점사에서 가져온 불서 몇 권을 번갈아 보아가며 허전한 마음을 달래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희중은 신라시대의 원효대사가 쓰신 《발심수행장發心修行章》을 보다가 정신이 번쩍 들었다. 희중은 그날 밤을 뜬 눈으로 새우다시피하고, 첫 새벽이 다가오기 전에 행낭을 챙겨 짊어지고 아무도 모르게 집을 빠져 나왔다.
- 본문 중에서 -
제8장 「참으로 중 되기 이리도 어려운가」에서는 2차 출가를 시도하여 유점사로 돌아와 혹독한 행자생활을 하는 과정을 다뤘다.
그 해 겨울 본사인 유점사에서는 아홉 명의 행자가 머리 깎는 날을 고대하며 처절한 수행을 하고 있었다. 그리고 부속 산내 암자와 말사에도 행자가 한두 명씩은 있었고, 해동이 되어 산길이 트이면 이들 부속 암자와 말사에 있던 행자들도 날을 정해 본사인 유점사로 와서 사미계를 받을 만한지, 아닌지 점검을 받게 되어 있었다. 그러고 보면 앞으로 머리 깎고 사미계를 받고자 하는 행자는 십오륙 명이 넘는 셈이었는데, 그 가운데서 과연 몇 명이나 주지스님의 냉엄한 점검을 통과하여 삭발 허락을 받게 될지 걱정이 아닐 수 없었다.
 - 본문 중에서 -
제9장 「준엄한 공부점검」, 제10장 「평생토록 계를 지키겠는가?」, 제11장 「아버지와의 두 번째 담판」, 제12장 「산넘어 산, 끝없는 공부」에서는 유점사에서 사미계를 받고 강원에서의 공부와 철저한 수행 과정 등을 다뤘다.
머리 깎고 승복만 입으면 스님이 되는 줄 알았더니, 사미계를 받았는데도 이제 겨우 예비승려라니, 참으로 스님이 되는데는 그 험한 행자산이 있었고, 천신만고 끝에 행자산을 넘었더니 사미산이 버티고 있었고, 죽을 힘을 다해 이 사미산을 넘어가면 또 하나의 험준한 비구산이 버티고 있다니, 스님이 되는 길은 그야말로 첩첩산중이었다.
- 본문 중에서 -
제13장 「큰 스승을 찾아서」, 제14장 「첫눈에 알아본 스승과 제자」, 제15장 「구하큰스님의 지극한 제자 사랑」, 제17장 「하루에 여섯 번의 문안인사」, 제18장 「큰스승 구하스님 열반」에서는 더 큰 공부를 위해 금강산 유점사를 떠나 통도사로 와서 구하큰스님을 만나 스승과 제자로서 치열한 수행과 정진을 해나가는 과정을 다뤘다.
구하노스님은 한눈에 명근스님이 장차 큰 법그릇이 될 것을 알아보았고 명근스님 역시 구하노스님이야말로 천하에 둘도 없는 어진 큰스승이시라는 점을 첫눈에 알아보고 이심전심으로 스승과 제자의 인연을 맺게 되었으니, 이야말로 전생에 지어놓은 복이 아니었을까.
어느 부모가 멀리 떨어져 있는 자식에게 이토록 철철이 속옷까지 챙겨서 보내주고 안경색까지 염려하여 보내 줄 수 있을까. 구하큰스님은 정말이지 제자 월하스님에게는 특별한 사랑과 배려를 아낌없이 보내주고 있었다.
- 본문 중에서 -
제16장 「불교정화운동, 그 중심에 서다」에서는 1954년 동산·청담·효봉·금오스님과 함께 불교정화운동을 주도했던 과정을 다뤘다.
월하스님은 불교정화운동의 초기부터 정화운동의 선봉에 떨쳐나서서 비구승 측 5인대표의 한 분으로, 그 험난했던 협상과 투쟁과 유혈사태까지 온 몸으로 겪으면서 끝내 불교정화를 이루어 내는데 결정적인 기여를 했었다.
월하스님이 정화를 마무리하기 위해 비구승 측 대표로 통도사를 인수인계 받기 위해 내려왔으니, 세상에 둘도 없는 무서운 스승, 당신께서도 대처승 승적을 갖고 계신 구하큰스님께서는 과연 이 사태를 어떻게 보고 계시며, 어떻게 나오실지, 월하스님으로서는 두려운 일이 아닐 수 없었다.
- 본문 중에서 -
이어 제19장 「불지종가 통도사의 조실로」, 제20장 「제자를 앞세운 스승의 눈물」, 제21장 「종단정치 떠나 통도사로」, 제22장 「통도사의 새역사, 영축총림」, 제23장 「하심下心의 화신」, 제24장 「“통도사 빚 갚으라” … 내놓은 거액」, 제25장 「구하스님의 환생이신가」, 제26장 「서울 구룡사와 월하스님」, 제27장 「한국불교 최초의 복지법인 자비원」, 제28장 「구룡지의 전설과 월하스님」, 제29장 「좋은 일 하고도 감추는 스님」, 제30장 「종정 자리 물러나 자비보살로」에서는 정화불사를 마무리한 뒤 종단의 여러 직책을 맡으며 종단을 바로잡는데 앞장섰던 일화, 통도사에서 주지·조실·방장 등의 소임을 맡으며 통도사를 명실상부한 불지종가요 국지대찰로서의 면모를 일신시킨 일화, 지극한 제자사랑으로 후학양성에 힘씀으로써 한국불교의 승풍을 진작시킨 일화 등을 다뤘다.
불지종가 국지대찰 통도사가 구하큰스님이 열반에 드셨다고 해서 상구보리 하화중생의 사명과 본분을 멈출 수는 없는 법. 구하스님이 열반에 드신 바로 그 해, 월하스님은 통도사 보광선원 조실로 추대되었으니, 이는 구하큰스님을 대신하여 통도사의 최고 어른의 자리에 모셔진 셈이었다. 
통도사 안에서나, 종단에서나 월하스님은 공적인 일과 사적인 일을 철저히 구별하셨고, 공적인 일로 출타하셨다가 공무를 마치고 통도사로 돌아오시면 자질구레한 영수증까지 낱낱이 첨부해서 남은 출장비는 몇백 원이건, 몇십 원이건 어김없이 종무소에 반납하는 분이 바로 월하스님이었다. 
월하스님은 제자들에게 늘 이렇게 말씀하셨다. “시줏물이나 사중 돈 쓸 적에는, 철공소에 시뻘건 쇳물 있지? 그 쇳물을 마시는 걸로 알아야 한다고!” 그 당시 젊은 후학들에게는 월하스님의 이런 「고집불통」이 「노스님의 답답함」으로 느껴지기도 했지만, 그러나 월하스님의 이런 엄격한 가르침은 후학들에게 평생토록 지켜야 할 귀감으로 마음 속 깊이 각인되었다.
1992년 9월, 「정신대」 위안부 할머니들의 노후를 위해 불교계가 중심이 되어 나눔의 집 건립 추진위원회를 결성하고 성금을 모금하고 있다는 소식을 듣자, 아무도 모르게 관계자를 은밀히 불러 일금 1억5천만 원을 전달했다. 그런데 ‘절대로 발설치 말라!’고 신신당부를 했음에도 불구하고 이 사실이 언론에 보도되자 월하노스님은 크게 노하셨고, 관계자를 크게 힐책했다. 월하노스님은 그렇게 하심하면서 무주상보시를 말없이 실천한 분이었다.
- 본문 중에서 -
그리고 제31장 「아름다운 황혼… 거룩한 열반」, 제32장 「열반 후에 겪은 세 번의 이적」에서는 1915년 출생하여 2003년까지 89년의 세월을 마무리하고 열반적정涅槃寂靜의 세계로 들어가는 모습을 잔잔하면서도 깊은 여운이 남게 묘사했다.
한 제자가 울음을 삼키며 스님께 여쭈었다. “스님, 다음에 또 통도사로 오실랍니까?”
“그거야… 자작자수自作自受 하는건데 내가 어찌 알겠냐고….” 스님은 더 이상 말씀이 없으셨다. 그리고 스님의 숨소리가 점점 사그러져 가고 있었다. “스님!” “스님!” 제자들이 고개를 떨구며 스님의 손을 움켜 잡았으나 스님의 손은 이미 식어가고 있었다. 서기 2003년 12월 4일, 통도사 정변전에서 제자들이 임종을 지키는 가운데 우리 곁에 오셨던 자비보살, 영축산의 보름달, 통도사의 도인, 노천당 월하老天堂 月下큰스님이 열반에 드셨으니, 세수는 89세요, 법랍은 71세였다.
- 본문 중에서 -
한편 노천문도회 대표 성파스님은 ‘발간사’에서 “승속을 막론하고 어지럽고 혼란한 이 시대 스님의 비구다운 삶의 모습이 많은 이들의 나침반이 되었으면 좋겠다는 문도들의 한 생각이 스님의 행장을 한 권의 책으로 만들어 발간하기에 이르렀다”면서 “스님의 은은한 달빛 같은 가르침이 많은 이들의 마음의 강에 비추기를 바란다”고 밝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