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경후
동국대 불교학술원 교수
송운 유정을 바라보는 세간의 눈길은 한결같지 않았다. 조선 조정의 신료들이나 유학자들은 그를 호국의 화신化身으로 찬탄하기도 하고, 천출賤出에 속한 일개 승려가 나라를 구한다고 동분서주하고 있음을 비웃기까지 하였다. 심지어 불교계의 스님들조차도 송운이 전란에 참여한 사실이나 일본으로 끌려간 조선인 포로를 송환시킨 것을 두고 수행은 하지 않고 세상사에 끄달려 산다고 꼬집기도 하였다. 예나 지금이나 뛰어난 사람을 두고 세상의 평판은 한결같지 않고, 시기와 질투가 난무한 법이다.
송운이 1594년 4월과 7월 두 차례에 걸쳐 가토 기요마사와 회담하고 그 내용을 토대로 상소문을 올렸다. 선조는 그를 불러 환속하여 속인이 된다면 벼슬과 부귀영화를 주겠다고 하였다. 1602년 일본의 상황을 정탐하고, 1605년 사절단으로 일본에서 돌아오는 길에 1,391명의 포로를 귀국시켰을 때는 부모와 조부와 조모, 증조부와 증조모에 이르기까지 품계品階를 추증하기도 하였다. 사대부나 백성이 아닌 천민으로 여겨왔던 승려의 신분으로 승병을 이끌고 왜적을 토벌하고, 두 차례나 적진에 들어가 협상에 참여하는 등 그 기여가 남달랐기 때문이다.
그런가 하면 실록을 편찬한 사관史官의 입장은 달랐다. “국가가 무사武士양성을 위해 벼슬과 녹봉을 후하게 대우해주었음에도 불구하고 정작 외침의 상황에서는 장수다운 용맹은커녕 두려움으로 도망가기에 급급하여 적을 물리치는 전공戰功 역시 죽을 날이 멀지않은 늙은 승려와 승군에게 빼앗기고 있다.”는 것이다. 아울러 “일본과의 협상 역시 수치스러운 것도 부족하여 일개 승려인 송운에게 맡긴다는 비변사의 생각이 비루하다.”는 것이다. 『선조실록』의 내용이다.
삼십 년 만에 그대를 반가이 만나니
구중궁궐에서 자니의 영광 떨어졌네
솔은 홀로 빼어나 절개 온전히 지키고
구름은 절로 한가히 날아 정이 있어라
출가한 승려는 사업이 없다 말하지 말라
나라 일에 힘씀이 공명 위한 건 응당 아니지
가을바람 속 관동 길에 석장을 짚고
산 속으로 가시어 밝은 달을 구경하소
-이산해, 「산으로 돌아가는 산인 유정에게 주다」, 『아계유고鵝溪遺稿』 중에서-
이산해李山海와 같이 송운을 걱정해주는 사람도 있었다. 송운과 이산해는 젊은 시절부터 그 교분이 두터웠다. 그는 1561년 선과禪科에 급제하고, 봉은사에 머물면서 많은 유학자와 친하게 지냈다. 이산해도 그 가운데 한명이다. 시에 반영된 송운이 절충장군折衝將軍이 된 것은 1594년이니 이산해의 말대로 30년 만에 만난 셈이다. 그는 ‘송운松雲’을 운으로 시구를 지어 수행자의 풍모를 읊고, 송운이 공명심을 위해 충의忠義를 내세운 것은 아니라고 지적하였다. 송운에 대한 세간의 오해를 씻어주고 있었다. 이산해는 “산 속에서 밝은 달을 구경하라.”고 하여 궁극적으로 송운이 수행자의 본분을 지키고 살아갈 것을 바라고 있는 것이다.
사명당은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문도들에게 “여래如來가 세상에 나온 것은 원래 중생을 구호하기 위해서이다.”라고 하였다. “왜적을 물리치는 것이 자비의 가르침을 저버리지 않는 것”이라고 하였다.
그러나 저 송운이 배운 것은 어떤 것이었던가. 우리 유학자가 군주와 어버이를 저버리고 윤리를 등진다고 나무라는 것이 아니었던가. 그런데도 창졸간에 소매를 걷어붙이고서 의로움으로 일어섰고, 위태롭고 어려움 속에서 칼날을 무릅쓰고 절의節義를 온전히 하였다. 그가 임금에게 충성하고 인륜에 독실한 것이 이와 같았으니, 이는 바로 양심을 똑같이 받고 태어나서 꼭 그렇게 하려고 하지 않아도 그렇게 하게 된 것이다. 그러니 불씨佛氏가 말하는바 진심眞心과 진성眞性이라는 것도 번쩍번쩍 빛나는 곳에 있는 것이 아니고 바로 여기에 있음을 알 수 있는 것이다. 그러고 보면 송운과 같은 분은 참다운 여래라고 말해도 좋을 것이요, 또 우리 유도儒道 속의 인물이라고 말해도 좋을 것이다.
-송인명宋寅明의 「분충서난록발문奮忠.難錄跋文」 중에서-
1738년 영의정 송인명은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조헌이나 고경명은 성현의 글을 읽고 천리天理와 인륜을 중요하게 여겼기 때문에 의병장으로 거병할 수 있었지만, 송운은 충과 효를 저버린 부류라고 규정하였다. 그러나 유학자들이 비난했음에도 불구하고 송운은 거병하였고, 절의를 온전히 했다는 것이다. 송인명은 송운이 군왕에게 충성하고 인륜에 독실한 것이 인륜의 도리 때문으로 해석하였고, 불교의 진심眞心과 진성眞性 역시 그와 같은 이치로 해석하였다. 결국 송인명은 송운을 ‘진여래眞如來’라고 하였다. 송운조차도 선조에게 올린 상소문에서 “먹물 옷을 입은 승려가 되어 스스로 속세를 버리고 소외되었으나 한 끼의 공양을 먹을 때마다 어찌 한시라도 임금과 어버이를 잊을 수 있었겠습니까.”라고 하였다.
벌써 하늘은 이미 추워지고
흰 눈은 한없이 내림이로다.
붉은 머리와 왜적들의 옷이니
종횡으로 계속 잇달아 감이로다.
우리 백성들을 어육魚肉으로 만드니
도로에 송장이 서로 베고 뒹굴고 있음이로다.
슬프고 슬픔을 또한 통곡함이니
날은 저물어 가고 푸른 산은 무성함이로다.
요해는 어느 곳이요 하니
그리운 임 계신 곳을 바라보니 하늘 끝이 아득함이로다.
-송운의 문집 중에서-
송운은 당시 왕이었던 선조에 대한 염려와 어육魚肉이 되고 있는 백성들 때문에 비통한 심정을 그대로 읊고 있다. 이것은 수행자가 갚아야 하는 부모·임금·스승·백성의 은혜, 즉 사은四恩에 대한 보답을 전제로 하고 있다. 임금을 포함한 중생구제가 수행자의 도리라는 것이다.
이런 다섯 가지의 행복을 모두 갖추었으니 마땅히 새나 짐승과 같이 헛되이 죽고 살아서는 안 될 것이다. 서원하건대 우리 벗들은 다시 지난날의 저축한 것을 아끼지 말고 천지와 성현들의 지극한 은혜에 보답하는 동시에 나라를 위해 기원하고 백성을 위해 기원해서 천하가 태평하기를 이루게 함이로다. 이와 동시에 또한 무량한 미래겁의 세상에서도 영원히 형과 아우가 될 인연을 이루어야 함이로다. 서원하건대 우리 좋은 벗들은 다시 머리를 조아려 스스로 생각함이로다.
-송운의 「갑회문甲會文」 중에서-
송운이 20여 세에 동년배 출가자와 갑회甲會를 결성하면서 맹세한 글이다. 그는 이 글에서 다섯 가지 행운을 말했다. 첫째 20여 세가 되도록 살아남은 행운, 둘째, 위태로운 시대에 어버이가 남겨주신 몸을 잃지 않은 것, 셋째, 불법佛法을 만난 것, 넷째, 회원들이 산중에 기거하면서 법회에 동참하여 담소하며 함께 노닐고 있는 것, 다섯째, 총명하고 남자의 모습을 갖추어 사람들의 버림을 받지 않은 것이다. 그가 살았던 시기가 정치나 사회경제적으로 안정된 시기가 아니어서 온전한 삶과 죽음에 대한 문제가 유난히 빈번하게 등장하고 있다. 따라서 사명당은 자신의 수행을 통해 나라와 백성들이 살기 좋은 태평성대가 이어지기를 기원하고 있다.
세간은 그가 명성과 이익만을 쫓는다고 모함했지만, 그는 오로지 자신의 수행과 중생만을 생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