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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화맞이 여행

 


홍성범
숲해설가


봄, 온 세상이 꽃으로 가득한 시기다. 여름 꽃도 예쁘지만 긴 겨울을 지나 맞이하는 봄의 꽃들은 그 자체가 생명의 신호요 생동감이다.
한동안 해마다 봄꽃을 먼저 보기 위해 여수 영취산으로 구례 산동면으로 대구 비슬산으로 봄맞이 산행을 다녔다. 그중에서도 나의 봄꽃 여행의 절정은 어김없이 전남 광양 매화마을이다.
하얀 꽃망울을 피우는 매화에서부터 홍매화, 청매화까지 그 고운 자태와 향기에 흠뻑 취하고 귀경하면 온갖 시름을 잊을 수 있었다. 그리고 몇 주 지나서 창경궁 옥천교 부근에 핀 매화를 다시 보면 봄이 오롯이 내 것이었다.
광양 매화마을은 신지식인으로도 선정된 홍쌍리 여사가 척박한 야산을 온갖 고생을 하며 일군 곳이다. 이제는 수형 40년 넘은 매화나무로 자라 해를 거듭할수록 더욱 좋은 봄맞이의 전설이다.
매화는 다섯 장의 순결한 꽃잎을 가진 장미과의 아름다운 꽃이다. 그 향기는 더욱 매혹적이다. 아쉬운 점은 꽃이 피면 오래도록 매달려 있지 못해 덧없이 피었다가 지고 마는 것이 미인박명에 비유되곤 한다.
살구나무와 구분이 쉽지 않지만 2년생 가지가 녹색이고 종자가 과육과 잘 분리되지 않는 것이 특징이다.
매화는 찬 서리를 이겨내는 강인한 성정이 고난과 역경을 극복해 가는 선비의 의연한 기개를 닮았다 하여 군자의 꽃으로 여겼다. 억압에도 굴하지 않고 불의에 물들지 않으며 오히려 맑은 향을 주위에 퍼뜨리는 모습에서 선비의 기질을 보여준다는 것이다. 난초, 국화, 대나무와 더불어 4군자로 사랑받은 이유다.
세한삼우歲寒三友의 하나로 겨울에도 푸르름을 잃지 않는 소나무와 대나무와 더불어 시인 묵객들에게 사랑받는 작품소재가 되었다.
 중국 송나라 때 어느 비구니 스님은 어느 날 매화를 통해 깨달음을 얻고 그 때의 환희를 시로 남겼다.


종일심춘불견춘終日尋春不見春
장려답파기중운杖藜踏破幾重雲
귀래시파매초간歸來試把梅梢看
춘재지두이십분春在枝頭已十分
종일토록 봄을 찾아 헤매었으나 볼 수 없었네
짚신 발로 산정에 올라 구름까지 찾아보았지
돌아보니 언뜻 코끝을 스치는 매화향기
봄은 어느새 찾아와 가지에 앉아 있었네


매화는 가장 일찍 봄을 알리는 꽃이다. 매년 매화가 피는 봄이면 선비들의 탐매探梅 여행이 이루어졌다. 전통적인 탐매 여행은 당나라 시인 맹호연孟浩然으로부터 시작되었다고 알려졌다. 그는 장안 동쪽의 깊은 산에 숨어 살면서 산속에 자생하는 매화나무에서 처음 꽃이 피는 나무를 발견하면 오래도록 그 자리를 떠나지 못했다고 한다. 그가 장안에서 파교를 건너 산으로 탐매를 떠났기 때문에 ‘파교삼매灞橋三昧’라는 고사가 생겼다.
중국에는 산과 들에 매화가 많이 자생했기 때문에 이처럼 야생매화를 찾았지만 우리나라에서는 사찰이나 고택에서 자라는 매화를 주로 감상했다. 선비들은 지방 어느 산골에 희귀한 매화가 있다고 하면 그 매화를 보기 위해 길을 나섰다.
매화나무 아래에서 시를 짓고 술 향기와 매화 향기에 취했으며 풍류를 즐겼다. 오늘날로 보면 봄꽃놀이요 매화소풍이다. 일본에서 벚꽃놀이를 좋아하는 것과 달리 우리 선조들은 매화 소풍을 즐겼으니 그 기질이 상이하다. 선조들은 매화 속에 깃들인 선비정신을 받들고 마음의 때를 씻기 위해 온몸으로 매향을 들이켰다.
매화는 충절을 상징하며 선비의 기개와 의지를 나타낸다. 역사적으로 많은 명현들이 매화를 호로 삼았다. 사육신의 한 사람인 성삼문의 호는 ‘매죽헌梅竹軒’이다. 단종에 대한 충성심을 설중매와 절개의 상징인 대나무로 표현했으리라. 매월당梅月堂 김시습이나 중종 때의 명필 매학정梅鶴亭 황기, 우국열사였던 매천梅泉 황현 모두 매화를 자신의 호로 삼았다. 윤봉길 의사의 호 역시 매헌梅軒이다. 충절을 최고의 가치로 여기고 오로지 나라와 민족을 위해 목숨까지 버릴 수 있었던 위인들도 이처럼 매화를 사랑했다.
전통적으로 매화는 달을 상징한다. 화화에서는 차가운 겨울의 보름달을 배경으로 꿋꿋하게 선 배화를 격조 높은 소재로 여긴다. 수많은 명작들이 둥근 보름달과 함께 설중매를 그렸다.
현존하는 최고의 매화 그림은 고려 태조 왕건 능의 벽화이다. 매화와 함께 대나무, 소나무를 섞어 그린 이 벽화는 당시에 이미 매화를 가꾸는 일이 상당히 성행했다는 것을 말해준다. 고려시대 초기에 이미 스님들이나 일부 귀족들 사이에서 매화를 심고 가꾸던 원예 기술이 일반에게도 널리 퍼지게 되었다.
매화는 낙화도 아름답다. 낙화의 아름다움을 즐기기 위해 정원에 심는 꽃나무는 살구나무, 복사나무, 자두나무, 벚나무 등 장미과 나무들이다. 화사한 꽃도 좋지만 떨어지는 꽃잎도 아름답다. 그중에서도 매화의 낙화야말로 문장가라면 누구든 한두 편의 시를 남겼을 정도다. 봄날 지면을 가득 덮은 새하얀 꽃잎은 눈처럼 맑고 깨끗하다. 낙화의 순결을 범할 수 없었던 어느 스님은 공작 깃털로 꽃잎을 쓸어 좁은 길을 내었다고 하는데 하물며 속인이 어찌 꽃잎을 밟고 지날 수 있었을까.
매화는 네 가지 고귀한 성품을 지니고 있다고 알려져 있다. 함부로 번성하지 않아 희소가치가 있으며, 어린 나무라 할지라도 가지가 옆으로 퍼져 고태가 있다, 줄기는 비대하지 않고 날렵하며, 한꺼번에 활짝 피지 않고 반쯤 개화한 것이 헤프지 않다.
빛깔이 짙은 홍매보다 흰빛의 백매를 더욱 격조 높은 것으로 여겼다. 그중에서도 꽃받침이 연한 녹색인 백매를 으뜸으로 여겼다.
전통적으로 동양에서는 모란을 ‘화중지왕花中之王’으로 받들며 꽃 중의 꽃으로 숭상했다. 그러나 모란은 매화에 비해 너무 화려해서 선비의 기질에 맞지 않는다고 여겼다. 그래서 옛 선비들은 모란의 농염濃艶보다는 매화의 냉염冷艶을, 모란의 이향異香보다는 매화의 암향暗香을 사랑했다.
매화의 열매인 매실은 술을 담가 마시거나 매실청으로 가공해 먹었다. 미숙과를 간장이나 된장에 절이면 장아찌가 되고, 독에 저장하여 식초로 만들어 조미료로 사용했다. 일본에서는 소금에 절일 때 소엽의 잎을 함께 넣는다. 이렇게 하면 소엽의 붉은 색소가 물들어 ‘우메보시’ 라는 매실 장아찌가 된다. 매실의 씨를 빼고 꿀에 졸이면 매실정과가 된다.
매화의 꽃봉오리도 좋은 식재료다. 꽃봉오리를 모아 말렸다가 뜨거운 물에 우려내면 매화차가 되는데 매화차를 마시면 매향을 혀끝에서도 맛볼 수 있다. 또 매화를 베주머니에 싸서 술 항아리에 넣었다가 꺼내어 마시는 술을 매화주라 하여 봄을 온 몸으로 느끼기에 충분했다.
매화나무는 남부지방에서 자라는 식물로 추위에 약하다. 그런 매화를 창경궁의 금천교 주변에서 볼 수 있어 신비롭다.
봄이 더 가기 전에 ‘탐매 여행’을 떠나 그 기개를 닮아 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