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르기에 마침내 조화롭다
정성운
텃밭농부
몸이 무리했나 보다. 오른쪽 눈 아래가 간질간질해 거울에 비추어 보았더니 약간의 염증 증세가 나타났다, 붉어졌다. 3월 말에 내가 대표로 참여하고 있는 신대승네트워크의 총회가 있었다. 창립 10주년이어서 이후 10년의 모습을 그려보는 작업도 같이했다. 지난해 11월부터 10차례가 넘는 모임과 토론이 있었다. 여러 회원이 참여한 가운데 총회와 비전 선포식을 마쳤다. 작은 단체이지만, 내게는 큰 행사였다.
그러는 사이 봄이 왔다. 고개를 들어 둘러보니 꽃의 시절이다. 이제 봄을 즐겨도 좋을 것 같다. 내게 봄은 밭의 계절이다. 그동안 왕래가 뜸했던 밭에 더 자주 나갈 수 있게 되어 즐겁다. 밭에 간다는 생각만으로도 설렌다. 나에게 봄은 밭으로 다가온다. 또 겨울옷의 무게가 어깨를 누르는 느낌이 오면 마침내 봄이다. 부지런한 농부들의 밭은 벌써 거름을 넣고 흙을 뒤집어 놓았다. 거름 냄새가 공기를 물들였다.
내 밭의 첫 작물은 상추와 쑥갓, 붉은 갓, 잎채소다. 씨앗을 뿌렸다. 씨앗이 움터 잎을 펼치기까지는 한 달 이상 걸린다. 그래서 모종도 사다가 심었다. 모종을 심은 이유는, 봄이 내어주는 채소를 빨리 먹기 위해서다. 도랑 옆의 미나리와 밭둑의 쑥은 저절로 잘 자란다. 감자는 심지 않았다. 대개의 텃밭에서는 첫 작물로 감자를 심는데, 우리 집에서는 감자를 즐겨 먹지 않는다.
강의하는 낯선 경험
지난주엔 강의하는 낯선 경험을 했다. 불교환경연대 활동가 리더십 교육. 나는 2001년 불교환경연대가 창립하면서 사무처장을 맡아 10년을 일했다. 이때의 경험을 바탕으로 활동가들에게 해줄 말을 해달라는 요구였다. 내 경험은 나에게 한정될 뿐인데, 다른 사람에게 무슨 보탬이 되겠냐는 생각이 들어 두 손 들어 흔들었다. 매일, 하루에도 몇 번씩 바람이 불지 않아도 흔들리는 삶을 사는 내가 무슨 얘기를 해준단 말인가. 진짜 그렇다. 잠자리에 들어서도 뒤척이는데. 활동가들, 특히 아직 연차가 적은 이들은 불교환경활동을 자기의 삶으로 삼아야 할지를 고민하고 있다. 이들도 흔들리고 있다. 이런 주제의 얘기는 다른 사람이 해줄 수 없는 것이라는 거듭된 요청을 끝내 물리칠 수 없었다. 흔들리는 이들끼리 마음을 나누는 것도 의미가 있을 것이라는 내 변명도 보태졌다. 내 강의는 경험의 명암을 얘기하는 것으로 시작했다. 주섬주섬 그날의 기억을 되살려 여기에 옮겨본다.
경험은 사람을 이끌고 밀어주는 저력이다. 마음과 몸으로 겪어 지혜의 자양분이 될 수 있다. 나의 경험이 어려움을 헤쳐 온, 그것이 현재 긍정적이든 부정적으로 영향을 끼치는 이력인 것은 분명하다. 그래서 경험치를 절대화하는 경향으로 흐른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발걸음을 붙잡는 족쇄로 작용하기도 한다. 아만으로 가는 지름길이다. 그래서 경험은 때때로 위험하다. 또 하나 경계할 것은 자기완결, 논리의 완결성이다. 대개의 사람은 자기의 생각과 주장을 제시할 때 완결성을 갖추려고 노력한다. 미덕이긴 하지만, 완결성을 확보하기 위해 자기 것 외의 것에 대해서는 중요성을 낮추려 한다. 논리적 완결성으로 모순을 감추려 한다. 생각과 말은 늘 자기는 물론 듣는 이를 빠지게 하는 함정을 만드는 행위다.
우리는 이미 보살이다
이날 내 강의 주제는 ‘나는 어떤 활동가가 되고 싶은가?’였다. “활동가는 보살이다.”라고 말했다. 보살이 되어야 한다는 말이 아니다. 이미 보살이다. 보살이란 곧 상구보리上求菩提 하화중생下化衆生하며 사는 중생을 가리킨다. 상구보리는 수행이며, 하화중생은 회향이다. 보살은 수행하며 중생들을 보살피는 행을 즐거워하고 기꺼워하는 행자行者이다. 이미 우리는 그렇게 살고 있다. 그러니 그렇게 살겠다고 마음 낼 필요도 없다. 경전에서는 보살의 원을 세움으로써 보살이라고 말하고 있다. 초기불교 연구자인 마성 스님은 발원함으로써 보살이 된다고 했다.
“이처럼 대승불교에서 말하는 보살은 비록 아직 깨닫지는 못했지만, 보리심菩提心(즉 본래의 지혜를 깨닫고 자비행)을 일으켜 보살도를 실천하려고 발원한 사람들입니다. 이들을 ‘범부보살’이라고 부릅니다. 대승불교의 보살은 서원에 의해 탄생합니다. ‘원願’이란 보살이 추구하는 삶의 목표이자 원동력입니다.”
이로써 불교환경연대의 활동가는 ‘환경보살’이다.
우리는 환경보살이라는 이름을 지니고 있으면서도 서로 다르다. 속도, 성향, 살아온 과정, 현재 삶의 처지 등등 거의 모든 것이 다르다. 일본의 인간관계 연구자인 우다가와 모토카즈는 최근 번역 출간된 책 『타인과 일을 한다는 것』에서 “타인과 일을 한다는 것은 아무리 노력해도 서로를 이해할 수 없다는 사실부터 인정하자.”고 말한다. 우다가와는 차이를 ‘골짜기’로 비유한다. 골짜기를 먼저 알아차리고 다리를 놓는 과정이 대화라고 강조한다.
타인과의 관계는 조화로움을 만들기 위함이다. 조화로움으로 가는 길의 첫 번째는 자기 드러내기다. 드러냄으로써 서로 다름을 알 수 있다. 나의 세대는 다름을 드러내는 것을 불온하게 여겼다. 교복, 스포츠형 짧은 머리가 학교에서 허락하는 유일한 옷차림이었다. 군사부일체君師父一體, 협동 단결, 총화, 이런 것이 올바른 정신상태로 표상됐다.
연기법은 조화를 위한 가르침이기도 하다. 연기법의 핵심적인 가르침은 변화이다. 연기법은 자기를 벗어나서 넘어서라는 가르침이다. 왜냐하면, 나를 포함하여 관계의 요소들이 늘 변하기 때문에 나에게 머물 수 없다. 연기하므로 나는 시시때때로 변하는데, 그런데도 나는 나를 고집한다. 특히 무엇이 좋고 싫어함에서 그러하다. 나는 이런 성향의 사람이어서 이런 것을 좋아하고 저런 것이 싫어하는 점을 내세울 때가 있다. 역할의 비중이 클수록 자기를 고집해서는 안 된다. 역할은 나를 이루는 새로운 요소이므로 이를 받아들여야 한다.
우리는 공동체의 일원이다. 공동체는 한 울타리라는 물리적이고 가시적인 것만이 아니다. 획일화된 구조가 아니다. 개인이 축소, 양보, 후퇴, 유보, 묻히는 것도 아니다. 그것은 공동체가 아니라 폭행이다. 공동체는 나를 깨우쳐주고 이끌어주는 관계이다. 나를 드러내게 해주고, 변화하도록 해주며, 함께여서 더욱 좋은 것이 공동체이다. 그러므로 공동체는 나이며, 나의 확장이다. 공동체의 더 정확한 이름은 공이체共異體이다. 같이[共] 다르게[異], 다르게 같이. 차이를 유지하면서도 함께 함으로써 새로운 상태를 만들어내는 것. 서로 다름에 바탕을 두어 혼자보다는 둘, 셋, 여럿이 있어서 좋을 때 비로소 이루어지는 것이 공동체다.
부처님 가르침에 의지해서
공동체와 일상의 운영 원리는 민주주의와 아나키즘이다. 민주주의를 흔히 다수결, 대의제, 권력과 이익의 쟁취와 배분 등으로 이해하는 것은 단편적이다. 내가 생각하는 민주주의는 말 그대로 내가, 각자가 주인 됨이다. 내가 주인이니 너도 주인이다. 주인 됨은 쉽지 않다. 일본에서 야마기시즘 실현지를 만들고 운영 방안을 만든 야마기시는 함께 삶의 첫째 조건으로 각자의 감정과 의사를 표출하는 것을 제시한다. 이것이 진짜 민주주의다. 그런데 민주주의는 어렵다. 감정과 의사 전달이 언제나 제대로 이뤄지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아나키즘은 세 가지 원칙이다. 첫째, 인간의 자율성을 중시한다. 인간이 자유의지를 가지고 있으며, 이성적 판단 능력을 갖추고 있으므로, 책임 있는 존재가 될 수 있다는 의미이다. 둘째, 권위주의적 지배를 거부한다. 아나키즘은 행동의 변화를 강제하지 않고, 생각의 변화를 합리적으로 제안하는 이론적 또는 전문적 권위는 인정한다. 세 번째는 협력적 공동체를 추구한다. 자기 존중과 상호 존중, 자기 발현과 조직의 발전이 분리되지 않아야 하기 때문이다.
어렵더라도, 흔들리더라도 가야 할 길이라면 가야 한다. 부처님의 가르침에 의지해서, 도반과 함께. 이게 인생이지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