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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슬럼독 밀리어네어>를 보고

조현
한겨레신문 종교전문기자

한국에서 슬럼가의 사람들은 갈 곳 없이 쫓겨나다 죽어가고 있는 때 슬럼가 천지인 한 인도인이 백만장자가 되는 영화가 각광을 받고 있다. <슬럼독 밀리어네어>다. 영화는 슬럼가에서 자란 차이왈라(차를 나르는 심부른꾼) 소년이 인도 텔레비전 인기 퀴즈쇼에 출연해 승승장구해 백만장자가 된다는 이야기다. 학교에 다닌 적조차 없어 퀴즈 문제를 도무지 풀 수 있을 것 같지 않은 소년 자말이 계속 퀴즈를 맞춰 상금을 축척해가자 이를 시기한 사회자의 고발로 경찰은 자말을 데려와 고문을 하면서 무슨 속임수를 쓴건 지 자백하라고 압박한다. 그 누구도 퀴즈쇼 문제 하나하나가 인도의 모든 문제를 안고 있는 슬럼가에서 그가 직접 겪은 이야기 속에 답이 있다고는 생각치 않는다.


영화에서 자말은 엄마와 형 살림과 함께 슬럼가에서 살아왔다. 엄마가 종교간 폭동으로 힌두교도들에 의해 죽음을 당하고 둘은 버려진다. 살림은 슬럼가의 굶주리는 아이들을 돕는 자선사업가로 위장해 아이들을 맹인으로 만들어 구걸을 시켜 이를 착취하는 놈들의 마수에 걸려든다. 동생 자말을 데려오게 한 놈들이 자말의 눈을 멀게 하려는 찰라 살림은 동생의 눈에 부어질 뻔한 뜨거운 약물을 놈들의 얼굴에 던지고 극적으로 도망쳐 기차를 탄다. 그러나 어린 시절부터 친형제자매처럼 지내온 라띠까는 그 기차를 타지 못한 채 놈들에게 붙잡히고 만다. 살림은 그들을 이용하려했던 놈들과 다름없는 이들의 하수인으로 들어가 슬럼가의 개로 살면서 백만장자를 꿈꾼다. 그러나 자말은 오직 두고 온 첫사랑 라띠까를 잊지 못하다 결국 그를 찾아 나서고, 퀴즈쇼에 승리해 백만장자가 되고, 악의 구렁텅이에서 첫사랑마저 구해낸다는 해피엔딩이다.


화면을 가득채운 슬럼가의 모습을 보니 다시 인도에서 느꼈던 그 불편한 감정들이 고개를 내민다. 장기간 인도 여행을 하면서 인도 중부 도시 푸네역에서 남부 께랄라주 트리반드롬까지 40시간이 넘는 기차를 타고 갈 때였다. 인도의 기차역은 늘 구걸을 하기위해 몰려든 슬럼가들의 사람들로 북적인다. 한 정거장에서였다. 바로 내가 앉은 좌석 창밖에서 얼굴이 희멀겋고 조그만 사람이 얼굴이 아프리카 흑인에 가까울 만큼 검고 덩치가 큰 사람의 뺨을 철석철석 때리고 있었다. 맞고 있는 사람은 한눈에도 천민이었고, 때리는 사람은 최고 계급인 브라만으로 보였다. 그런 모습은 인도의 어디에서나 쉽게 볼 수 있다.


기득권을 가진 사람들, 즉 권력과 부와 지식까지도 독점한 사람들은 계급제도를 목숨처럼 지킨다. 계급은 타인들을 진입하지 못하게 쳐놓은 장벽이다. 그들은 교육에서도 ‘자유로운 경쟁’이 아니라 자신들이 가진 부와 권력으로 자신의 자녀들이 쉽게 자신이 가진 것을 세습할 수 있는 체제를 고수한다. 그들은 기득권층이 가진 절대 우위의 환경에서 확보하는 ‘일부 지식’을 우위의 증거로 영재와 둔재를 갈라야 한다는 신념을 일반 대중들에게 주사한다.


나는 ‘시크릿’이란 책을 읽은 적은 없다. 그러나 내가 아는 한 진짜 시크린은 누구나 자기만의 천재성을 갖고 있다는 것이다. 인류의 성현들이 모두 공개한 바이니 시크릿(비밀)도 아니지만.


부처님이 깨달음을 얻은 뒤 한 첫마디도 “누구나 지혜와 덕성을 가지고 있는데, 그것을 모르니 안타깝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계급적 우위, 즉 기득권을 가진 이들은 천재는 천재고, 둔재는 둔재며, 기득권 자제가 가진 ‘일부 분야’의 우위를 일평생 동안 고정화시키기 위한 분리를 일찌감치 하기를 원한다. 남은 시간 더 이상 피곤하지 않게.


우리 인간의 대부분의 잠재의식은 무한하며, 극소수만이 우리가 가진 능력의 10%도 사용하지 못한다는 언설은 현실에선 기득권의 신념 아래 묻히기 일쑤다. 그래서 대부분의 사람들이 어느 적성과 계기와 기회를 만난다면 분출해 나올 수 있는 거대한 지하수는 지상의 통로를 만나지 못한 채 썩고 만다. 그래서 슬럼가의 소년이 백만장자가 된다는 것은 그야말로 천애고아가 왕자님을 만나는 신데렐라가 되는 것만큼이나 지난한 일이다.


더욱 슬픈 것은 천행으로 백만장자가 되거나 기득권과 같은 대열에 올라선 이들이 더욱 더 졸부근성을 발휘하면서 차별에 앞장서는 것이다. 이 영화에서 슬럼가 출신으로 최고의 방송인으로 성공한 퀴즈쇼 사회자가 슬럼가의 촌놈이 자신과 같은 성공을 이루는 꼴을 결코 봐줄 수 없다며 자말을 파멸시키기 위해 안달하고, 기득권도 아니면서 기득권의 개가 되어 자말을 고문하는 형사들처럼.


그래서 동서고금을 보아도 상민 출신으로 최고의 지위에 올랐음에도 민초들을 잊지 않고 헌신한 남강 이승훈이나 백범 김구 같은 인물들을 찾아보는 것은 쉽지 않다. 그래서 인도에서나 한국에서나 그나마 동생과 동생의 연인 라티까의 행복을 위해 한 몸 바칠 수 있는 순교자가 백만장자가 된 촌놈보다 더욱 더 그리워진다.


그런데 근대 인도엔 그런 순교자가 있었다. 암베드까르(1893~1956)다. 근대 불가촉천민의 아버지인 그는 인도 독립 뒤 헌법기초위원장과 초대 법무장관을 지낸 인도 헌법의 아버지다.


인도의 어디를 가나 마하트마 간디와 함께 그의 동상을 볼 수 있다. 인도에선 간디와 암베드까르의 생일을 국경일로 제정해 두고 있다.


암베드까르는 뭄바이와 푸네 인근 데칸고원에서 불가촉천민으로 태어났다. 그는 초등학교 시절 불가촉천민이었기에 교실 뒤쪽에 자리 한 장을 펴놓은 채 조용히 앉아 있어야 했고, 교실 안 물주전자에 손도 댈 수 없는 차별을 받았다. 그러나 불가촉천민이면서도 영국군 장교로 군사학교 교장을 했고 교육열이 강했던 아버지 덕에 대학에 들어갔고, 미국과 영국, 독일에서 공부해 박사가 돼 돌아왔다.


암베드까르의 남다른 점은 많이 배우고 부자가 된 불가촉천민의 상당수가 지위와 돈을 배경삼아 상위 카스트로 탈바꿈하는 반면 그는 인도 초대 법무부장관으로서 불가촉천민에 대한 차별 철폐를 헌법에 명문화하는 등 불가촉민의 해방을 위해 평생 몸 바친 점이다.


그는 힌두교인들이 자신의 기득권만을 내세우며 평등한 법조차 받아들이지 않자 인간의 평등을 강조한 불교로 개종운동을 벌였다. 그리고 차별의 근거가 된 힌두교의 마누법전을 대중들이 보인 가운데 불살라 버렸다. 그런 행위는 인도에선 자살행위와 같은 것이었지만, 인간다운 삶을 회복하기 위해 살해의 보복조차 감내하겠다는 결연한 의지를 보인 것이다.


암베드카르는 1956년 수백만의 불가촉천민과 함께 불교로 개종하는 역사적인 의식을 집행했다. 암베드카르는 개종식을 마치자마자 네팔의 카트만두에서 개최되는 세계불교도연맹의 개회식에 참석해 연설하고 나서 불교유적지를 순례한 뒤 뭄바이로 돌아왔다. 그는 개종식 두 달 뒤 시체로 발견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