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심행 구룡사 불자
2016년 2월 19일 ~ 29일까지 불자라면 다녀와야 할 것같은 생각과 두려움도 있었지만 큰 맘 먹고 인도 여행을 20명의 불자가 스님과 함께 인도 북부 갠지스강 유역 부처님 성지를 다녀오게 되었다.
인도는 한반도의 15배의 면적에 13억 인구에 사실 불교 유적지만 다녔지만 인도인 중 불교인은 별로 없고 힌두교, 이슬람교를 믿는 신도들이 많다.
인도는 BC 1500년 아리안의 침입으로 계급 사회가 생겨난다.
브라만교가 생기면서 윤회설을 주장하며 착하게 살면 후세에 브라만, 크샤트리아, 바이샤, 수드라중 최고 계급인 브라만으로 태어난다고 주장하며 카스트 제도를 강화한다. 브라만교의 불평등의 반발로 BC 500년 싯다르타에 의해 불교가 탄생, 모든 인간은 평등하고 소중한 것이라고 주장하며 불교가 꽃피게 된다.
인도는 BC 326년경 그리스 알렉산더 침략을 받으며 분열을 하게 되고 BC 261년 아쇼카 대왕이 마우리아 제국으로 인도 대륙을 통일하게 되는데 정복하는 과정에서 수많은 사람들을 살생하고 전쟁의 피비린내 나는 참상에 회의를 느껴 아쇼카 대왕은 불교의 가르침에 빠져 곳곳에 절과 탑을 세우고 스리랑카, 중동까지 불교를 퍼뜨린다.
우리가 다녔던 성지도 아쇼카 석주, 탑 등이 많았다.
아쇼카 사후 그리스 헬레니즘 세력이 들어와 인도 북부지역 지배권은 서서히 무너진다. 이민족 출신 카니슈카왕은 불교 신자로 곳곳에 사원과 탑을 세우고 개인의 해탈을 목적으로 하는 소승불교에서 벗어나 대중의 구제를 강조하는 대승불교가 탄생. 깨달은 자를 뜻하던 부처가 인간을 구원하는 힘을 가진 신으로 숭배하여 이때부터 불상도 만들어지는데 이때 불상은 간다라 지역의 그리스 조각상에 영향을 받게 되는 특징이 있다.
4세기 경 불교는 철학적으로 빠지면서 대중들에게 멀어졌던 브라만교에 변화의 바람이 분다. 모든 종교의 교리와 잡신을 포함시키는 힌두교를 탄생시킨다.
굽타가문이 세력을 확산하여 굽타제국 시기부터 불교가 서서히 몰락하고 힌두교가 자리 잡으면서 브라만의 권위가 크게 강해지고 카스트 제도가 뿌리 깊게 정착하게 된다. 불교의 본고장에서 불교가 시들해지는 것이다.
13세기 유일신 알라의 가르침을 내세워 카스트 제도를 부정하는 이슬람교가 탄생하지만 오랜 관습에 젖은 인도인의 호응을 크게 받지는 못한다. 17세기 네덜란드, 프랑스, 영국 등이 동인도 회사를 만들고 영국 동인도 회사가 적극 활약 야금야금 세력을 넓혀 100년 동안 영국이 인도를 지배하게 된다.
영국이 10분 만에 인도인 1,500명의 목숨을 앗아가는 암리차르학살 사건으로 반영 감정이 더욱 세져 1925년 국민회의 지도자가 된 간디는 영국에 불복종 운동을 시작하고 국민회의 대표였던 네루가 독립을 요구하게 된다. 1947년 8월 15일 영국으로부터 독립 인도인들의 인기를 한 몸에 받고 있던 간디는 카슈미르 지역을 놓고 인도와 파키스탄이 전쟁을 벌이자 단식투쟁. 1948년 1월 힌두교 청년이 쏜 총을 맞고 간디는 숨을 거둔다.
힌두교 성지에 이슬람 사원이 있는 것이 문제가 되어 힌두교도들이 이슬람 사원을 부수면서 충돌하여 무슬림 230명을 학살하고 인도의 힌두교 민족주의는 오늘날까지 맹위를 떨치고 있다.
인도는 90년대 초 신경제정책으로 공과대학을 세우면서 IT 전문 인력을 배출하며 최근 5년간 현 모디 수상 체제에서 7% 경제 성장을 하며 지방 자치권한이 왕의 권한처럼 되어 민주적이면서도 계급사회가 존재하는 비민주적인 아이러니한 국가이다. 특히 농촌으로 가면 여성들의 차별도 심하여 결혼 시 지참금도 가져오고 바깥 활동도 마음대로 할 수 없으며 하리잔으로 불리는 불가촉천민들은 비참한 생활에 도농 격차는 심각한 수준이다. 하지만 인도의 경제 규모는 세계 7위라고 하니 앞으로 어떻게 발전할 지 주목할 수밖에 없는 이유다.
첫째날, 인천공항을 떠나 홍콩을 경유, 10여 시간의 비행 끝에 델리공항에 도착했다. 넓고 깨끗한 공항은 4년 전 지었고 10분 거리에 있는 델리 호텔은 기업에서 2년 전 조성했다는데 똑같은 모양의 건물들이 많이 들어 서 있는걸 보니 발전했음이 느껴진다.
둘째날, 델리 호텔 출발, 아그라로 가는 길에는 대통령궁 인도문을 지나간다. 인도 수도 델리를 지나가기만 하는 것이 아쉽다. 빨간 건물들은 영국식 건물이란다. 영국의 지배를 받았지만 영국에 우호적이라고~~.
고속도로엔 JP회사 광고판이 보이고 도로 운전자 경고판엔 “늦게 도착하는 것이 영원히 도착하지 않는 것보다 낫다.”는 글이 쓰여 있다니, 뭔지 생각을 하게 만드는 재밌는 문구다.
아그라 타지마할에 도착하니 전체가 하얀 대리석으로, 인도 무굴제국의 5대 황제 샤자한이 사랑하는 왕비 뭄타즈 마할이 38세의 나이에 14번째 아이를 출산하다 죽자 아내를 위해 만든 묘지이다.
22년 동안 공사를 하고 내부엔 다이아 등 보석을 박아 화려하게 치장했지만 지금은 없어졌다.
이슬람 건축 양식에 아라베크 풍 꽃 장식의 고급스럽고 잔잔한 꽃무늬는 개인적으로 좋아하는 문양이다. 상감기법과 기둥은 만져보면 평면인데 육각처럼 보여 시각 효과가 대단하다.
세계 7대 불가사의에 등장하는 무덤이라 하기엔 너무 웅장하고 화려한 대리석의 타지마할에 할 말을 잃었다. 말년에 황제 샤 자한은 무리한 건축 사업으로 아들에게 왕위를 박탈당하고 아무나강이 보이는 아그라 요새에 갇혀 죽게 된다. 하지만 그는 아그라 요새에서 강 건너 아내의 묘지인 타지마할의 모습을 볼 수 있었고 죽은 다음에는 아내 뭄타즈와 나란히 묻혔다고 하니 죽은 후에는 아내를 만나 행복하지 않았을까?
한 남자의 지극한 사랑이 후대엔 관광객들이 찾는 명소가 되어 이 장소에 와 있는 자신이 나도 과거의 왕비로 돌아 간 듯 상상을 하며 걸었다. 부인을 얼마나 사랑했으면 전쟁터에도 데리고 나가고 이렇게 웅장한 건물을 지었을까? 집착의 건물인가? 어쨌든 부럽다.
관광지답게 인도 전통복장 사리를 이쁘게 입은 여자들이 눈길을 끈다. 온 몸을 치장을 많이 했다.
여자들의 멋 부리기는 어느 나라든 마찬가지인 듯~ 일요일이라 사람도 많고 인증샷을 하며 건물을 한 바퀴 돌았다. 타지마할만 생각한 아그라에 세계 문화유산에 등재된 아그라성으로 이동하였다.
아그라성의 건축을 보니 인도 건축이 대단하다는 생각이 든다. 붉은 벽돌로 지어졌고 인도는 힌두교 나라지만 16~19세기 이슬람 왕조인 무굴제국의 지배를 받아 무굴제국의 3대 황제 조다악바르에 의해 세워지고 이후 3명의 왕이 이 성을 완성하였다. 악바르 대제는 무굴을 최전성기로 이끈 왕으로 이슬람교를 믿었는데 힌두교의 아내를 맞아 힌두교와 이슬람의 화합을 실천, 오늘날에도 인도에서 가장 사랑받는 왕이란다. 이곳이 샤자한이 말년을 외롭게 보냈던 곳이다.
아그라성에서 멀리 타지마할이 스모그인지 뭔지 뿌연 인도 날씨 땜에 희미하게 보인다.
드디어 오늘 저녁 걱정했던 야간열차를 탄다. 철로에 마구 버려진 쓰레기 더미 창문 사이로 빼곡히 보이는 사람들과 열차 난간에 매달려 가는 사람들 그래도 이 열차가 몇 시간씩 연착하기가 일쑤이나 나름 제 시간에 도착 감사한 마음으로 침대칸에 들어서서 가방은 간신히 침대 밑에 밀어 넣고 좁은 열차 안. 딱 내 몸 하나 들어갈 정도의 자리에 밤 열시쯤 누우니 우린 인도 올 때부터 고생은 각오 한 터라, 이 열악하고 지저분한 공간도 나름 포근하다. 인도인들에겐 이 정도의 침대칸도 아무나 탈 수 있는 게 아니란다. 커튼을 치고 나만의 공간에 들어가서 그래도 이것도 어디인가 생각하니 스르르 잠이 살짝~~.
나중에 이것도 추억으로 두고두고 얘깃거리가 될 거라고 하더니 호텔에서 잔 것보다 더 기억에 남는 건 사실이다. 12시간 이상 열차를 타고 이튿날 아침 곤다역에 도착하니 우리의 캐리어를 옮기는 짐꾼들이 그 무거운 캐리어가방을 한 사람에 몇 개씩 머리에 이고 팔에 걸고 아슬아슬 계단을 내려가면서 차로 가져가 옮기는데 잘 먹지도 못 할 텐데 웬 기운이 저리 센 걸까 신기했다.
셋째날, 열차로 이동, 오전 11시쯤 곤다역에 도착 호텔로 이동, 짐을 풀고 점심식사 후 25년간 우안거를 지낸 기원정사로 향했다. 금강경의 한 구절 “이와 같이 나는 들었다. 한때에 부처님께서는 사위성의 기수급 고독원에 계셨는데 큰 스님들 천 이백 오십인과 함께 계셨다.” 금강경에 나오는 기수급 고독원의 기원정사이다.
기원정사는 금강경을 설하시고 코살라국의 부자 수닷타가 땅 주인 코살라국 왕자의 요구대로 황금을 깔아 부처님께 기증하여 안거를 보내신 곳이다. 2천 6백 년전에 세워졌다는 이 건물은 터만 남았지만 이곳이 방대한 장소였다는 게 짐작이 간다. 어느 멋진 건물들 보다 위대한 성인이 계셨던 곳이니 불자로서 느낌이 다르다. 곳곳에 다른 나라 스님들이 기도를 하고 계셔서 우리도 보리수 나무 아래 자리를 잡고 스님과 우리들이 가져온 찹쌀도 올리고 기도를 하였다.
이 찹쌀은 나중에 잘 생긴 인도 남자 요리사가 푸석한 인도 쌀에 섞어 밥을 해 주는데 아줌마인 우리보다 더 한국 요리를 잘해 너무 맛있게 먹었다.
보살님이 힘들게 이동하며 가져온 한과도 올리고 나눠 먹으니 꿀맛이다. 날씨도 덥지 않고 여행하기 좋은 날씨이다.
기원정사에서 조금 더 올라가면 앙구라 말라 집터가 나오는데 잘못된 스승을 만나 살인자가 되었다가 부처님의 제도로 삼보에 귀의했던 앙구라 말라의 집터를 보고 근처 기원정사를 기증한 수닷타장자의 집터도 계단을 오르며 보니 당시 부자였음이 집터만 보아도 알 수 있었다. 며칠간의 인도 순례는 잊지못할 시간으로 기억될 듯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