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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담 의심

풍담 의심(楓潭 義諶, 1592~1665)


오경후
동국대 불교학술원 교수


풍담 의심 스님은 해남 대흥사의 12종사宗師 가운데 1대 종사이다. 조선후기 대흥사의 종사는 대흥사만을 선양했던 인물이 아니다. 쇠락한 조선불교를 일으켜 세운 혁혁한 공헌자들이다. 조선불교를 중흥시키고자 발원했던 청허 휴정과 편양 언기 스님의 의지가 대흥사에서 시작되어 꽃피웠던 까닭이다. 이 가운데 풍담 스님은 스승들의 원대한 의지를 실천에 옮기고자 진력했던 대표적인 인물이기도 하다.
이서상李瑞相은 1668년 표훈사에 세운 풍담 스님의 비문을 찬술하였는데, 다음과 같이 스님을 칭송하고 있다.


경전에서 말하기를 금강金剛은 담曇이 길이 머물러 다함이 없다고 하노니 임제臨濟가 동쪽을 향해 마음으로 여러 부처를 전하도다. 청허와 편양에 이르러 선禪과 교敎가 하나로 합쳐지니 대사가 그 가르침을 이어받음에 살도 아니고 뼈도 아니로다. 1백8군데 사찰의 등불이며, 만천萬千 봉우리의 달이니 진여眞如의 본래 성품은 항상 비추어 없어지지 않는 도다. 화엄의 오묘한 이치는 교화의 근원을 열어 밝히니 구르는 법의 수레바퀴가 널리 많은 번뇌를 구제하도다.
스님의 법명은 의심義諶이고 호는 풍담楓潭이다. 속성은 유柳씨이고 오늘날 김포인 통진通津에서 출생하셨다.아버지는 화춘華春이고 어머니는 정鄭씨이다. 어머니 정씨가 일찍이 구슬을 삼키는 꿈을 꾸고 나서 임신하였다고 한다. 나서 성장하면서부터는 풍채가 빼어나서 보통 아이와 달랐다고 한다.


스님은 16세에 출가하여 성순性淳 대사에게서 머리를 깎았고, 원철圓徹 스님을 뵙고 계戒를 받았으며, 청허 스님의 법을 이은 편양 언기鞭羊彦機 스님 문하에서 법을 이었다. 환속하라는 아버지의 권유를 뿌리치고 천관산에 있는 원철 스님을 찾아가서 『서장書狀』·『도서都序』·『절요節要』·『선요禪要』 등 사집四集을 배워 그 큰 뜻을 파악하였다. 스님은 다시 묘향산으로 들어가 편양 스님의 문하에서 선을 닦아 묘지妙旨를 깨치고 법맥을 이었다. 편양 스님은 그가 매우 총명하고 뛰어나 남다르다고 여겨서 법을 이을 후계자로 정하였다. 오로지 전해지는 오묘한 뜻을 모두 일러주니 선사는 마음으로 계합하고 신통하게 이해하여 조금도 막히거나 거리끼는 것이 없었다.
편양 스님이 일찍이 말하기를, ‘공문空門의 의발이 여기에 있도다’라고 하였다. 스님은  이미 그 심인心印을 얻은 후 팔도의 유명한 산에서 구름처럼 노닐었다. 그 뒤 남방으로 내려가 기암奇巖·소요逍遙·호연浩然·벽암碧巖과 같은 선지식 밑에서 수행하여 선지禪旨를 검증받고, 마침내 금강산에 머무르면서 후학들을 지도하였다. 1644년(인조 22) 편양 스님이 묘향산에서 병세가 위급해지자 선사가 가서 안부를 묻고 병시중을 들었다. 편양 스님은 늘 여러 학자가 풀어 놓은 『화엄경華嚴經』·『원각경圓覺經』의 주석과 소(註.)가 기준이 없이 산만하다고 여겼고, 또 빠진 곳이 많아 온전하지 못했기에 글을 다듬고자 하였으나 아직 이루지 못하였다. 이에 풍담 스님의 손을 잡고 부탁하였다. 풍담 스님은 그 뜻을 마음에 새기고 따랐는데 생각을 가라앉히고 가다듬기를 반복하면서 5~6년을 보낸 뒤에 그 오류를 바로잡아 살피고 또한 종지宗旨를 드러내어 밝혀 여러 총림叢林에 보내었다. 이를 두고 당시 불교계에서는 “보통의 스님과 소승 학인(下乘)으로 하여금 읽게 하여 명료하게 그 법에 의심나는 점이 풀렸으니 총림叢林 후학에게 공로가 있다.”고 칭송하였다. 즉 이를 계기로 깨달아 이해한 사람들이 이루다 헤아릴 수가 없었던 것이다. 특히 금강산과 보개산寶盖山의 두 산에 머물 때는 『화엄경』 등 1백 수십 권에서 그 잘못된 곳을 고쳐 그 음音과 해석을 바로잡았다.
사실 조선의 불교는 건국 직후부터 많은 탄압과 억압으로 그동안 축적되고 발전했던 선교학禪敎學이 쇠락하였고, 수탈과 착취로 스님들은 출가와 환속을 거듭하면서 수행환경은 온전히 유지되지 못하고 있었다. 때문에 『화엄경』을 비롯한 불교계의 중요한 교리를 담고 있는 경전의 체계와 해석이 오랫동안 질서를 이루지 못하고 방치되고 있을 뿐이었다. 이를 본 편양 스님은 선교학에 탁월했던 풍담 스님에게 부탁한 것이다. 불교가 바로 서기 위해서는 부처님의 말씀이 정확해야 하고 바른 해석만이 정법正法의 기틀을 굳건히 할 수 있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스님은 스승의 부탁을 실현하기 위해 5~6년 동안을 두문불출하고 잘못된 곳을 바로잡았다. 그 덕분에 혼란스럽고 어렵게 다가왔던 부처님 말씀이 명확해졌고, 체계적으로 정리되었던 것이다.
결국 풍담 스님의 이와 같은 노력은 조선후기 불교계의 교학체계가 확립되고 발전하는 계기가 되었고, 다양한 해석의 기회를 마련할 수 있는 자리가 마련되었다. 이른바 조선후기 불교계에서 유행했던 ‘사기私記’는 경전이나 주요 논서論書들에 대해 자신의 견해를 자유롭게 찬술한 해석서들이다. 이를 계기로 팔도의 사찰에서는 스승과 제자 간의 경전교육과 토론의 장이 매우 활발해졌다. 대흥사의 12종사와 강사講師는 조선후기 선교학의 융성을 위해 기여했던 스님들로, 지금도 『대흥사지大興寺志』에 수록되어 전하고 있다. 풍담 스님도 대둔사에서 큰 법회를 열었는데, 그 법회에 모인 대중들이 무려 250명이나 되었다고 한다.
스님은 1665년(현종 6) 4월 금강산 정양사正陽寺에서  가벼운 병세를 보였는데 이에 게송 하나를 읊고 여러 문도들을 불러 이별을 고하였다. 가부좌한 채로 입적하니 3월 초 8일이었고 세수는 74세, 선납禪臘은 60이었는데 기이한 향기가 방에 가득 차서 며칠간 없어지지 않았다. 다비하여 사리 5과를 얻었는데 문인 등이 선사가 주석했던 여러 산에 가서 부도를 세웠다. 또 선사의 전법傳法은 실제 묘향산에서 비롯되었으므로 사리 한 과를 모셔서 보현사普賢寺 동쪽 기슭에 안장하고 이에 비석을 세웠다. 스님이 열반 전에 남긴 게송은 다음과 같다.


奇恠這靈物  기괴저영물
臨終尤快話 임종우쾌화
死生無變容 사생무변용
皎皎秋天月 교교추천월


신기하여라. 이 영물靈物이
임종에 더욱 상쾌하다니
나고 죽음에 변한 모습 없으니
가을 하늘에 달만 밝게 비추네


제자는 500명이 넘었고, 이름이 알려진 70명의 제자 중 정원淨源·설재雪齋·도안道安·명찰明察·자징自澄·도정道正·법징法澄·장륙莊六 등은 종지宗旨를 선양하여 각각 일파를 이루었다. 편양 스님의 문인 준기俊機와 도안道安 스님 등이 풍담 스님이 남쪽 지방을 유람하면서 주석하였던 곳에 그윽한 광명을 천발闡發하여 스님의 생애와 업적이 영원히 썩어 없어지지 않기를 도모하여 대둔사에 탑비와 부도를 세우기도 하였다.
영변寧邊 보현사普賢寺에 세워진 풍담대사비楓潭大師碑에 글을 쓴 조종저趙宗著는 다음과 같이 스님의 성품을 정리하였다.
선사는 온후하고 차분하여 바라보면 공경할 만하였다. 인평대군麟坪大君은 매우 귀하게 태어났음에도 선사를 만나보고는 존경의 예를 극진히 다하였고, 백헌白軒과 용주龍洲 여러 공들은 방외方外의 친교를 맺었다고 한다. 선사는 후학도 잘 대우하여 다양한 방법으로 가르쳐서 이끌고 도와주었다. 혹은 편안히 앉아 말없이 가르침을 보였고, 혹은 아주 자세하게 분석하여 지도하였으니 그 기질과 성품에 따라서 방편의 도를 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