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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활과 단절되지 않은 수행정진이라야

특집_한국불교 미래, 수행 정진에 있다.

월천 이귀인
한국석불선양회회장


산 넘고 물 건너 많이도 다녔다.
석불(石佛), 석탑(石塔), 마애불(磨崖佛)이 있는 곳이면 그 길이 가시덤불이거나 땀을 뻘뻘 흘리는 가파른 벼랑길이거나를 가릴 것 없이 공양물 짊어지고 찾아 나선지 어언 9년째.
서당개 삼 년이면 풍월을 읊는다는데, 이제 석불이나 석탑을 바라만 봐도 감히 어느 시대 작품인지를 알 수 있는 경지가 되었다고 자부한다.

매월 한 차례 전국 방방곡곡에 산재한 석불을 찾아 오체투지를 하다보면 자비롭고 은은한 석불의 미소가 ‘너 왔구나!’ 라며 반겨주는 것 같다. 이렇게 부처님의 가피를 온 몸으로 받고 보니 내 삶 속에 아무리 큰 역경이 닥쳐온다 해도 침착하게 풀어갈 수 있는 지혜가 생겼다.
석불의 미소를 대하면 한 달 동안 탐진치(貪瞋痴) 삼독심(三毒心)으로 잔뜩 오염된 마음의 먹장구름이 사르르 녹는다. 남을 미워하고 증오하고 시기했던 마음이 부끄러워 얼굴이 달아오른다.

조용히 합장하고 참회진언을 왼다.
“옴 살바못자 모지 사다야 사바하”
살아보니 이 세상 녹녹한 것이 없다.
사람으로 산다는 것. 중생으로 산다는 것. 남자로 산다는 것. 가장(家長)으로 산다는 것. 이 모든 것이 어깨 위에 큰 바위를 짊어지고 힘겹게 살아가는 고행이요, 참고 또 참으며 살지 않으면 안 될 이 땅. 그래서 부처님께서는 이 세상을 ‘사바세계(娑婆世界) ’라 하셨고, ‘감인토(堪忍土)’ 라 하셨음이라.

많고 많은 생명체 중에서 받기 어려운 사람의 몸을 받았으니 복 중의 대복이요, 하 많은 종교 중에서 불교를 만나 부처님의 바른 가르침을 등불로 삼으니 어찌 감사하지 않으리오. ‘인신난득(人身難得) 불법난봉(佛法難逢)’ 이거늘, 두 가지를 얻은 기쁨을 어찌 필설로 표현하리.
부처님 가르침의 요체는 <칠불통게(七佛通偈)>에 잘 나타나 있다.


諸惡莫作 衆善奉行 自淨其意 是諸佛敎
제악막작 중선봉행 자정기의 시제불교


모든 악업을 짓지 않으며, 많은 선행을 베풀면서, 스스로를 맑고 밝히는 것이 모든 부처님의 가르침이다.


얼마나 쉽고 명쾌한 말씀인가.
이 도리(이치)를 누구나 안다 하지만 실제로는 여든 살 먹은 노인도 실천하기는 힘든 것.
그래서 마음을 맑힌다는 명분으로 불교에서는 많은 수행방법이 존재한다. 참선, 염불. 절, 사경, 독경 등 수행 방법이 다양하고 이론도 많고 복잡하다.
이천 오백 년 전, 석가모니부처님 재세시에도 불교가 오늘날처럼 이렇게 어렵고 난해했을까.
글이 없던 그 시절. 무지몽매한 중생들을 향해 공(空)이 어떻고 성불(成佛)이 어떻고 하면서 어렵고 유식한 말로 설법을 했다면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이해 할 수 있었을까를 생각하면서, 요즘 한국불교가 너무 이론적이고 공론적이고 하늘에 있는 별 따기 식이라는 느낌을 종종 하게 된다. 종교는 접근하기 쉽고 배우기 쉽고 알기 쉬워야 한다는 게 내 생각이다.

‘한국불교의 미래는 수행 정진에 있다.’
틀림없이 맞는 말이다. 준비된 수험생이 시험을 잘 치르고, 잘 익은 과일에서 향기가 나듯, 평소부터 수행 정진이 몸에 배인 사람은 어디에 있든, 어느 길을 가든, 무엇을 하든, 늘 중심에 서 있게 마련이며 많은 사람들을 감화시켜 세상을 맑고 향기롭게 한다.

여기에서 수행정진이란 꼭 불교에만 국한된 좁은 개념이 아니다. 바르게 사는 것, 사회에 기여하면서 사는 것, 뭍 생명을 존중하고 사랑하는 것, 직분을 다 하는 것 등 실제 생활에서 투명하고 반듯하게 살아가는 것, 그 자체가 바로 수행이다. 어제와 오늘이 다르지 않다는 굳건한 마음으로 자기 본분을 놓지 않고 살아가는 것, 그 자체가 정진이라고 생각한다.
내가 잘 아는 어느 여성 불자에게서 전화가 왔다. 내용인즉, 스님들 하안거에 맞추어 자기도 절에 들어가서 하안거 동안 스님들과 똑같이 수행생활을 하겠다는 것이다. 나는 말렸다. 그 여성 불자는 서운해 했다. 칭찬해 주고 격려해 줄 것으로 믿고 전화를 했다는 것이다.
내가 말린 이유는 간단하다. 출가자와 재가자는 그 구분이 뚜렷하다. 이 여성 불자는 남편이 있고, 자녀가 있고, 가정이 있다.

수행도 좋고 불교도 좋지만 하안거 긴긴 나날 동안 주부의 역할, 엄마의 역할, 아내의 역할을 다 접으면서 가족과 인연 있는 사람들에게 큰 공백을 주는 것은 진정한 종교의 범위가 아니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무릇 종교의 역할은 ‘살아서 행복, 죽음의 극복’ 이다.
자기 한 몸 편하자고 행동한다면 욕심이다.
그러나 모든 사람들과 골고루 나누고자 하는 마음이 있다면 그것이 바로 발원이 되고, 이 발원을 꼭 잡고 나아가다 보면 보살도 되고 부처도 되는 것이다.

사람이 사람인 것은 자신을 반추하는 능력이 있기 때문이다. 뒤 돌아 본다는 것, 참회한다는 것, 두 번 다시 악행을 되풀이 하지 않는 다는 것, 그러면서 앞으로 꾸준히 전진하는 것, 여기에 인생의 묘미가 있고 수행의 참 맛이 있음이다.
내가 있는 위치에서 필요한 사람으로 존재하는 것, 많은 사람들의 의지처가 될 수 있는 사람, 무엇인가를 베풀고 나누면서 애환을 섭수하는 사람이 될 때, 그는 종교를 초월한 진정한 수행인이요, 한국 불교 미래의 여명이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