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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살이 지녀야 할 열 가지 몸과 말










  정우(頂宇)스님
   본지 발행인
   통도사 주지
   구룡사 회주

기축년(己丑年) 하안거(夏安居) 결제일(結制日)에 통도사(通度寺) 방장(方丈)스님께서는 이렇게 결제법문을 하셨습니다.

『석가불출세(釋迦不出世)하고 달마미서래(達磨未西來)라도 불법변천하(佛法徧天下)니 춘풍화만개(春風花滿開)로다.


부처님이 세상에 출현하지 않으셨다 하더라도, 달마대사가 서쪽에서 오지 않으셨다 하더라도, 불법은 온 천하에 두루 해 있었으니, 봄바람 불면 온갖 꽃이 만발한 것과 같도다.』 


이 법문을 다시 풀어본다면, “부처님께서 깨달음을 이루신 뒤 설하신 팔만장교(八萬藏敎)의 가르침이 본래 없었던 것을 만들어 낸 것이 아니라, 부처님께서 오시기 전에도 이 법은 우주에 충만하게 가득 있었고, 부처님께서 오시지 않으셨어도 이 법은 항상 존재하고 있었는데, 다만 부처님께서 오셔서 이 법을 만개해서 드러냈을 뿐”이라는 말씀입니다. 방장스님의 이 말씀이 너무 가슴에 와 닿았습니다.


서두에 이 말씀을 드린 연유를 비유를 들어 설명해보겠습니다.


얼마 전 우연찮게 건강관련 프로그램으로 생각되는 어느 TV 프로에서 ‘노래도 부르지 아니하면 노래가 아니요, 사랑도 표현하지 아니하면 사랑이 아니요, 웃음도 소리 내어 웃지 않으면 웃음이 아니다’라는 마지막 멘트를 하면서 끝내는 것을 보고 참 좋은 표현이라는 생각을 했습니다.


또 어느 날 여래사 법회 때 법문을 마치고 돌아오는데 휴대폰으로 󰡐오늘 법문 좋았다󰡑는 내용의 문자가 많이 들어왔습니다. 그래서 그 법문이 뭐가 그렇게 좋았기에 문자가 많이 오는가하고 다시 되짚어 보았습니다. 그랬더니 그 날 법문에서 “나는 당신을 어제보다 오늘 더 사랑할 것이고, 나는 당신을 오늘 보다 내일 더 사랑하겠습니다.”라는 말을 했던 기억이 났습니다. 󰡐아마도 그 말이 불자들의 귀에 쏙 들어왔나보다’ 스스로 생각을 해보았습니다.


그러한 생각을 하면서 내 방으로 들어와서 어느날처럼 발을 씻은 뒤 다시 비누칠을 해가면서 손을 씻고 있는 내 행동에 스스로 놀랐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지저분한 발을 씻는데 손이 없으면 안 되니까 손이 수고로움을 주고는 또 그게 좀 걸리니까 무의식중에 손을 깨끗이 씻은 것입니다.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면 일상적으로 일어나는 하찮은 행동으로 여겼겠지만, 그 때 마침 네팔 히말라산, 안나푸루나를 순례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 길이 얼마나 험한지 되돌아가고 싶은 생각이 들 정도였습니다. 그렇게 험한 길을 걸어 고생 끝에 숙소에 돌아와서는 곧바로 양말을 벗고 뜨거워진 발바닥을 부비고 종아리를 쓰다듬고 허벅지를 어루만지면서󰡐고맙다, 고맙다. 이렇게까지 내가 올수 있고 다닐 수 있어서 고맙다󰡑는 말을 되뇌이며 쓰다듬은 적이 있습니다.


그것은 발을 씻기 위해 손으로 발을 만진 게 아니고, 그 발이 고마워서 만진 것입니다. 그렇게 분별식심(分別識心)을 내지 않고 발을 만졌기 때문에 냄새니 지저분함이니 하는 그런 경계를 거기다가는 드러내지 않더라는 것입니다. 그저 험한 산길을 걸어온 것만도 고맙고 이렇게나마 걸을 수 있었던 것이 고맙고 해서 발을 쓰다듬는데 전혀 더럽다는 생각, 냄새난다는 생각이 일어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곳에서는 발을 먼저 씻고 발을 씻은 손을 다시 씻는 내 모습을 보면서 변덕이 심한 우리의 마음을 본 것입니다. 그 경계는 무엇이고 어디입니까? 엄지손가락을 치켜들면 최고를 뜻하지만, 손가락 다섯 개 중에서 엄지만 최고는 아니라는 말입니다. 합장을 하고 다소곳이 마음을 모을 때는 상대방에게 새끼손가락을 보여주게 됩니다. 그 새끼손가락은 구부러져 있고 보잘것없고 시원찮아 보이기도 하지만 합장했을 때의 새끼손가락이 아름답게 느껴지는 연유는 무엇입니까? 가정에서의 생활, 사회에서의 생활 속에도 그런 모습들을 찾아본다면 모두가 스승이고 모두가 선지식(善知識)이고 모두가 소중하지 않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것입니다.


만해(卍海)스님 시(詩) 중에 이런 구절이 있습니다. 


따스한 볕 등에 지고 유마경 읽노라니


가벼웁게 나는 꽃이 글자를 가리운다.


구태여 꽃 밑 글자를 읽어 무삼(무엇)하리오. 


우리가 글을 읽는 것은 글 속에 담긴 내용의 뜻을 알기 위해서입니다. 가벼웁게 나는 꽃이 글자를 가렸다고 해서 그 꽃잎을 훅 불어서 밑에 있는 글자를 보는 것이 아니라, 그대로 존치하고도 꽃 밑에 담겨져 있는 뜻을 볼 수 있다면, 선근(善根)과 지혜(智慧)로서 살아가면서 어울림을 가질 수 있다면 그것이 바로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보살(菩薩)이 열 가지 몸을 드러내는 연유와 다르지 않다는 말씀입니다. 


『불자들이여, 보살마하살에게 열 가지 몸이 있으니 무엇이 열인가. 이른바 모든 바라밀다(波羅蜜多)의 몸이니 다 바르게 수행(修行)하는 연고며, 자비희사(慈悲喜捨) 네 가지로 거두어 주는 몸이니 일체중생(一切衆生)을 버리지 않는 연고며, 크게 가엾이 여기는 몸이니 일체중생을 대신하여 한량없는 괴로움을 받으면서도 고달픔이 없는 연고며, 크게 인자한 몸이니 일체중생을 구호하는 연고며, 복덕(福德)의 몸이니 일체중생을 이익케하는 연고며, 지혜의 몸이니 모든 부처님 법신(法身)의 몸과 성품(性品)이 큰 연고며, 법의 몸이니 여러 길에 태어남을 아주 여윈 연고며, 방편(方便)의 몸이니 이 모든 곳에서 앞에 나타나는 연고며, 신통(神通)의 힘인 몸이니 모든 신통변화를 나타내는 연고며, 보리의 몸이니 좋아함을 따르고 때를 따라 바른 깨달음을 이루는 연고니라. 보살들이 이 법에 편안히 머물면 여래에 큰 지혜의 몸을 얻게 되느니라.』 


여기서 자비희사(慈悲喜捨)는 무슨 뜻입니까? 󰡐자비󰡑에서의 󰡐자󰡑는 자애로운 마음입니다. 그리고 상대가 좋은 일이 있을 때 함께 기뻐하고 󰡐비󰡑는슬픈 일이 있을 때 함께 나눌 수 있고 덜어줄 수 있는 마음입니다. 그것이 자비입니다. 또 󰡐희사󰡑라는 것은 기쁜 마음과 조건 없이 나눌 수 있고 집착(執着)하지 않으며 편협(偏狹)되고 이기적(利己的)으로 살아가지 않는 마음, 스스럼없이 버릴 수 있는 그런 마음입니다.


그것은 바로 일체중생을 버리지 않는 연고로 자비희사의 몸을 가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보살에게 10가지 이런 몸이 있는 것처럼 보살은 바라밀다를 행할 때 또 10가지의 말이 있는 것을 보게 됩니다. 


『불자들이여, 보살마하살에게 열 가지 말이 있으니 무엇이 열인가. 이른바 부드러운 말이니 일체중생으로 하여금 편안케 하는 연고며, 단 이슬 같은 말이 일체중생을 시원하게 하는 연고며, 속이지 않는 말이니 말하는 것이 모두 실제와 같은 연고며, 진실한 말이니 꿈에서까지 거짓말이 없는 연고며, 넓고 큰 말이니 모든 제석(帝釋)과 범천(梵天)과 사천왕(四天王)들이 존경하는 연고며, 매우 깊은 말이니 법의 성품을 보이는 연고며, 견고한 말이니 법음(法音)을 다함이 없는 연고며, 정직한 말이니 말하는 것을 알기 쉬운 연고며, 갖가지 말이니 때를 맞추어 나타내는 연고며, 일체중생을 깨우치는 말이니 그들의 욕망을 따라 알기 쉽게 하는 연고니라. 만일 보살들이 이 법에 편안히 머물면 여래의 위없는 미묘한 말을 얻게 되느니라.』 


10업을 이야기할 때 살생(殺生), 투도(偸盜), 사음(邪淫), 망어(妄語), 기어(綺語), 양설(兩舌), 악구(惡口), 탐․진․치(貪․瞋․癡)를 말합니다.


그 중 입으로 짓는 4가지 업 중에서 망령된 말이 제일 험한 말이고, 그 다음이 비단결 같은 말, 즉 거짓된 말이며, 여기 가서 이 말하고 저기 가서 저 말하는 것이 그 다음이며 마지막으로 악담입니다. 그런데 요즘 불교학자들 중에 기어를 맨 뒤로 놓는 분들이 있는데, 그것은 분명히 잘못된 것입니다.


금강경에 보면 여래(如來)는 시진어자(是眞語者)요, 실어자(實語者)요, 여어자(如語者)요, 불광어자(不狂語者)요, 불이어자(不異語者)라고 했습니다. 즉 부처님께서는 늘 진실 된 말, 실다운 말, 말 같은 말, 미친 소리 아닌 말, 다르지 아니한 말, 이런 말을 하신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 불자들은 정직한 말, 성실한 말, 진실 된 말, 말 같은 말, 실다운 말만 하도록 노력을 해야 합니다. 그래서 이러한 가르침과 이러한 이치 속에 머무르게 되면 부처님의 위없는 미묘한 가르침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앞에서 말씀드렸듯이 부처님은 깨달음을 얻으셔서 팔만대장경(八萬大藏經)이 생긴 게 아니라 이 법은 상주불멸(常住不滅)하기 때문에 신심(信心)을 가지고 지혜롭게 살아가는 사람들의 사고방식(思考方式) 속에서 드러나는 말이나 행동(行動)이 보살행(菩薩行)이고 그것이 바로 이러한 부처님 가르침 속에서 드러나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