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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도사상, 소통과 행복한 삶을 위한 통찰

김 재 권
동국대 불교대학 전문연구원


세월호의 대형 참사가 일어난 지 한 달이 넘었다. 사랑하는 가족들과 친지, 동료, 친구들을 잃은 유족들의 슬픔이야 이루 말할 수 없을 것이다. 설상가상으로 실종자 발표 후 한 명의 생존자도 구출하지 못한 국가적 재난상황을 지켜보는 대다수의 국민들도 슬픔과 분노, 무기력감에 빠져있는 상황이다. 과연 대한민국의 현주소가 어딘지, 우리가 도대체 어디로 향해 가고 있는지 되묻지 않을 수 없고, 무엇보다 이에 대한 진지한 성찰이 필요한 때이다.
그런데 이번 참사를 계기로 정부와 정치권은 물론이고, 언론과 사회 곳곳에서도 이구동성으로 비판적인 목소리를 내고 있다. 하지만 정작 국가적 안전대책과 후속조치가 제대로 이루어지고 있는지, 이번 사고를 뼈저리게 반성하여 반면교사로 삼고 있는지 의구심이 든다.
사실 세월호의 사고가 난 직후에 그동안 130회 정도의 잦은 고장과 안전성 논란으로 가동을 잠시 중단했던, 수명이 다한 고리원전 1호기의 재가동을 승인했다. 고리원전은 위험성을 알면서도 설계수명 30년이 만료된 시점인 지난 2008년 1월에 10년을 더 연장하여 2017년까지 재가동을 해나가고 있다. 원전전문가들의 위험성 경고와 지적 등에도 불구하고 경제성과 안전성의 갈림길에서 경제성을 우선시하는 위험한 선택을 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일들은 비단 고리원전이나 월성원전에만 해당되는 것이 아니라, 아파트의 수직증축 리모델링 허용 등 사회 곳곳에서 우리들의 생명과 안전을 위협하는 경제성 위주의 정책이나 일련의 조치들이 국민들을 위협하고 불안에 떨게 한다. 지난 5월 2일에는 서울 지하철 2호선의 추돌사고로 기관사와 승객 등 240여 명이 크고 작은 부상을 당했다. 사고 원인은 신호기의 고장으로 잠정 결론이 났지만, 근본적인 원인은 적자운영을 빌미로 승무원들의 인원감축, 노후장비나 설비, 안전관리점검 소홀 등이 심각한 문제로 대두된다. 이러한 문제는 KTX 고속철도에도 그대로 해당될 것이다. 최근 들어 자본주의 시장경제의 논리로 비용절감과 경영의 고효율성만을 강조하는 정책이 우선시 되는 한, 언제 어디서 대형 참사와 사고가 터질지 모를 일이다.
이제 사람을 먼저 생각하고, 국민의 안전을 최우선시하는 선진국형의 제도와 시스템이 마련될 때이다. 경제성장 일변도의 개발도상국에서 한발 더 나아가, 국민들의 삶의 질과 선진문화, 상생의 사회적 복지를 실현하는 제도와 시스템이 정착되어야 한다. 지난 6~70년대의 우리나라는 빨리빨리 문화가 경제성장의 원동력이기도 했다. 하지만 여전히 이 사회 전반에 만연하고 있는 과정보다는 결과 중심의 성장프레임에 기인한 잘못된 관행은 과감히 시정되어야 한다. 앞으로 우리 사회가 발전하고 누구나 안전하고 살맛나는 사회로 거듭나기 위해서는 인문학적 성찰과 전문가들의 올바른 진단들에 귀를 기울이는 노력과 실천도 뒤따라야한다. 특히 신자유주의의 경제구도 하에 무한 시장 경쟁 구조와 프레임이 점차 강화되고 있는 이 시대에 종교인들과 지식인들의 사회적 참여와 노력들도 더욱 요청된다.
일찍이 독일계 사회심리학자인 에리히 프롬(1900~1980)은 만년의 저작인 「소유냐 존재냐」에서 우리들 실존적 존재는 인생의 긴 여정에 두 가지 선택의 기로에 놓여있음을 설파하고 있다. 그 두 가지 기본양식은 ‘소유의 양식’과 ‘존재의 양식’으로, 이는 시사하는 바가 매우 크다. 그의 견해에 따르면, 소유와 존재에 대한 개념은 “소유는 사용에 의해 감소될 수밖에 없는 것들을 바탕에 두고 있다. 하지만 지적창조력이나 이성, 사랑과 같은 존재적 가치는 실행하면 실행할수록 증대된다.”고 한다.
우선 소유적인 양식의 삶은 물질적 가치를 중시하고 소유하는 것으로, 욕망의 충족을 우선시하는 방식이다. 한편 존재적인 양식의 삶은 사랑, 자유, 진정한 자아 등 정신적인 가치를 중시하는 삶이라 할 수 있다. 예를 들면 길가나 산에 어여쁜 꽃이 피어있을 경우에, 먼저 소유의 양식은 꽃을 꺾어 욕망을 추구하고 즐기는 것이다. 한편 존재의 양식은 꽃이 피어있는 자연 그대로를 즐기고 서로 함께 공존하고 향유하는 것이다. 결국 에리히 프롬이 말하는 이러한 두 가지 양식에 대해서는 다양한 해석이 가능하다. 하지만 그가 제시하는 인간의 참다운 행복이나 실존적인 존재의의는 소유적인 양식과 존재의 위기감을 극복하고 자아를 실현하는 곳에 있는 것이다.
이러한 깊은 통찰은 불교의 연기적 중도사상과 일맥상통한다. 중도中道는 붓다가 최초로 제시한 핵심사상으로, 이에 대한 해석은 대승에 이르기까지 매우 다양하게 제시된다. 이 가운데 가장 대표적인 것은 다음과 같이 『초전법륜경』의 고락중도苦樂中道의 기술에 잘 드러난다.
세존께서는 다섯 비구에게 말씀하셨다. “비구들이여, 출가자가 따라서는 안 되는 두 가지 극단이 있다. 그것은 저열하고 통속적이고 범속하고 성스럽지 못하고 이익을 주지 못하는 감각적 욕망에 대한 쾌락의 탐닉에 몰두하는 것이며, 괴롭고 성스럽지 못하고 이익을 주지 못하는 자기 학대에 몰두하는 것이다.
비구들이여, 이러한 두 가지 극단을 따르지 않고 여래는 중도를 완전하게 깨달았나니, 이 중도는 눈을 만들고, 지혜를 만들며, 고요함과 높은 지혜와 바른 깨달음과 열반으로 인도한다.”
그렇다면 이 중도란 무엇인가?
“그것은 바로 성스러운 8정도八正道로 바른 견해(正見), 바른 사유(正思惟), 바른 말(正語), 바른 행동(正業), 바른 생계(正命), 바른 정진(正精進), 바른 집중(正念), 바른 선정(正定)이다.
비구들이여, 여래는 참으로 이 중도를 통하여 완전하게 깨달았으며, 눈을 만들고, 지혜를 만들며, 고요함과 높은 지혜와 바른 깨달음과 열반을 얻었다.”
이와 같이 「중도」란 쾌락과 고행의 두 극단을 떠난 것으로, 구체적으로는 8정도를 가리키는 것으로 이해된다. 즉 8정도를 실천하는 것이 바로 중도라는 의미이다. 특히 중도의 의미는 기본적으로 바른 깨달음과 열반으로 인도하는 길로 해석된다.
하지만 이러한 중도사상에 담긴 의미를 현대적으로 심도 있게 살펴보면, 단지 불교 특유의 종교적이고 수행적인 차원의 노력을 넘어 우리에게 사회적인 여러 문제들을 해결할 수 있는 통찰과 혜안들을 제시하고 있다. 중도란 중간의 길, 혹은 이 쪽 저 쪽도 아닌 어중간한 지점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주지하듯이 중도는 가야금의 줄에 종종 비유되곤 한다. 가야금의 줄이 너무 팽팽하면 소리는 좋으나 쉬이 줄이 끊어지고, 느슨하면 끊어지지는 않으나 소리가 그리 좋지 않게 된다.
요컨대 중도란 연기사상의 구체적 실천으로 어느 쪽에도 치우치지 않고, 긴장관계 속에 존재하는 지적 통찰과 역동적 관계 등을 동시에 포괄하는 의미를 지닌다. 나아가 중도사상은 프롬이 제시하는 소유적 양식과 존재적 양식의 통합적 양면성, 성聖과 속俗의 관계 등을 포함하여, 불교적으로도 『반야경』의 공사상에 기반하고 있는 진속불이나 진공묘유의 개념과도 일맥상통한다고 본다.
이와 같이 중도사상이란 바른 견해에 입각한 지적통찰과 올바른 실천을 동반하는 노력을 동시에 포괄하고 있기에, 우리 사회의 많은 문제들과 계층 간의 갈등양상들을 해결할 수 있는 대안이나 실마리를 제시할 수 있다. 예컨대 최근에 일어나고 있는 대다수의 재난사고와 구조적인 부패구조는 인권이나 공익보다는 돈이나 어느 한편의 사익을 추구하는 과정에서 양산된 것들이다. 따라서 우리 사회가 이러한 구조적 모순들을 지혜롭게 해결하고, 중도적인 입장에서 사회적 대통합과 발전을 실현시키려면 중도사상에 입각한 올바른 성찰과 각고의 노력이 절실히 요청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