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경후
동국대 불교학술원 교수
나옹懶翁은 오랫동안 중국에 있으면서 여러 선지식을 널리 참견하고 원통圓通의 경지에 이르러 선림禪林의 사표師表가 되었다. 또 그의 법을 전수받은 이는 남봉 수능南峯修能이 적사嫡嗣가 되었고, 정심 등계正心登階가 이를 계승하였는데, 정심은 벽송 지엄碧松智嚴의 스승이다. 벽송은 다시 부용 영관芙蓉靈觀에게 전수하였는데, 그 도를 체득한 이는 오직 청허노사가 가장 뛰어나다.
허균은 청허의 문집 서문에서 나옹이 법안종法眼宗의 영명 연수永明延壽의 법과 황매종지黃梅宗旨를 계승했고 그의 법맥이 목우자→강월헌→남봉 수능→벽계 정심→벽송 지엄→청허 휴정→사명 유정이 법통을 이어갔다고 하였다. 때문에 편양은 이를 못마땅하게 여겨 『청허집』의 서문을 다시 쓰고 재 간행하였으며, 중관 해안中觀海眼은 “청허는 능인의 63대, 임제의 25세 직계자손이다. 영명은 법안종이고, 목우자(牧牛子, 지눌)는 별종別種이며, 강월헌(江月軒, 나옹)은 평산平山으로부터 분파分派된 것”으로 규정하였다. 청허의 연원인 임제종의 석옥 청공과 명확히 구분지은 것이다. 결국 허균이 찬한 석장비는 청허가 임제로부터 전해지는 순서가 잘못되어 있어 후세의 지혜에 눈 멀고 귀먹게 한다는 것이다. 조선불교계의 뼈대를 만들고 천년만년이 흘러도 변하지 않을 근간을 세워야 할 시점이었다. 물론 태고와 나옹의 법통을 놓고 지금까지 의견이 분분하다. 그러나 편양 언기는 스승이 수립한 법통과 공부법의 체계를 굳건히 유지해야 하는 사명감이 있었다.
한편 편양은 「선교원류심검설禪敎源流尋劒說」에서 선교에 대한 이론과 염불수행에 대한 입장도 밝혔다. 즉 선의 경절문徑截門, 교의 원돈문圓頓門, 정토淨土의 염불문念佛門의 3문을 제시하고 있어 청허 휴정의 수행전통을 계승하고 있는 것을 살필 수 있다. 이 가운데 편양이 가장 강조한 것은 경절문이었다. 경절문은 단계적인 절차를 거치지 않고, 본래면목本來面目을 터득하여 바로 부처의 경지에 오르게 하는 법문法門이다. 일찍이 지눌은 일체의 언어와 문자, 이론과 사유를 초월해서 화두話頭를 잡아 활구로 증입證入할 것을 강조하였다.
모든 불조佛祖의 기묘한 언구와 양구良久와 봉棒과 할喝과 백천의 공안公案과 갖가지 방편이 다 여기서 나왔다. 은산철벽銀山鐵壁이라 발붙일 곳이 없고, 석화전광石火電光이라 사의思議를 용납하지 않으니 이 교외별전敎外別傳의 선지禪旨는 이른바 경절문徑截門이다.
경절문은 불조의 말씀이 나온 곳이며, 역대 조사의 깨달음의 나룻배라고 할 수 있는 할과 방, 그리고 수많은 공안이 나온 온상이라는 것이다. 또한 경절문 수행은 어떤 장애를 극복할 수 있으며, 어설픈 알음알이조차도 발붙일 틈이 없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만큼 어려워 근기가 수승하지 않고서는 접근하기 어렵고 터득하기 어렵다는 것이다. 이것이 청허의 혜명을 이은 편양이 선교의 갈등을 종식시키고 선 우위의 교종을 강조하였으며, 교학을 공부한 이후에야 비로소 참선에 이르러야 한다는 수행의 기본입장을 정립시켰다.
사교四敎가 보이는 법체가 모두가 교묘하여 일만 법으로 한 마음을 밝힌 것이니 환화幻化에 즉卽하여 실상實相을 보인 것이다. 그 보인 바는 근경根境의 모든 법이요, 그 깨치는 것도 근경의 모든 법이다. 허공에는 본래 꽃이 없는데 꽃을 보는 이는 병이요, 법에는 차별이 없는데 차별을 보는 이는 망妄이다. 한 생각이 생기지 않으면 화택火宅이 곧 적광寂光이요, 털끝만큼이라도 어긋나면 적광이 곧 화택이다.
편양이 교학에 대해서도 규정한 부분이다. 그는 화엄華嚴·아함阿含·방등方等·법화法華의 사교가 교라고 했으며, 각기 차별이 있다는 것이다. 그는 사교의 일만 가지 법이 결국 한 마음을 밝히기 위한 것으로 허깨비의 실상을 바로보고 실상을 말하고자 한 것이라고 하였다. 즉 교를 보고 공부하지만, 교에 묻히면 꽃을 보고 차별을 둔다는 것이다. 때문에 그는 선문禪門에서는 최하의 근기를 위하여 교를 빌어 종통을 밝히지만, 궁극의 경지는 적광寂光이라고 하였다. 이른바 선이 최고의 공부법이라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편양은 염불문念佛門의 공부는 가고 머물고 안고 눕는 전체가 일심一心으로 서방정토西方淨土를 향해 있는 것이라 하였는데, 이것은 마음을 떠나서는 부처도 지옥도 없기 때문이라고 보았다. 요컨대 유심정토唯心淨土이다. 이것이 이전의 불교와는 뚜렷이 다른 모습니다. 흔히 서방정토는 스스로의 수행이 아닌 불보살의 가피력으로 극락왕생한다고 믿었다. 그러나 유심정토는 사바세계가 곧 극락이라는 것이다. 이른바 발상의 전환이다. 일체유심조라고 하지 않았던가.
이와 같이 편양은 청허의 임제법통과 선교학을 비롯한 수행체계를 확립하여 체계화시켰으며, 이후 조선불교계에 유포하여 한국불교는 그 정체성을 오늘날까지도 계승하고 있다.
종사宗師
강사講師
풍담 의심(楓潭義諶, 1592~1665)
만화 원오(萬化圓悟, 1694~1758)
취여 삼우(醉如三愚, 1622~1684)
연해 광열(燕海廣悅, 생몰연대미상)
화악 문신(華岳文信, 1629~1707)
영곡 영우(靈谷永愚, 생몰연대미상)
월저 도안(月渚道安, 1638~1715)
나암 승제(懶庵勝濟, 1629~1707)
설암 추붕(雪岩秋鵬, 1651~1706)
영파 성규(影波聖奎, 1728~1812)
환성 지안(喚惺志安, 1664~1729)
운담 정일(雲潭鼎馹, 1678~1738)
벽하 대우(碧霞大愚, 1676~1763)
퇴암 태관(退庵泰瓘, 687~1767)
설봉 회정(雪峰 懷淨, 1678~1738)
벽담 행인(碧潭幸仁, 1687~1748)
상월 새봉(霜月璽封, 1687~1767)
금주 복혜(錦洲福慧, 1691~1770)
호암 체정(虎巖體淨, 1687~1748)
완호 윤우(玩虎尹佑, 1758~1826)
함월 해원(涵月海源, 1691~1770)
낭암 시연(朗巖示演, 1789~1866)
연담 유일(蓮潭有一, 1720~1799)
아암 혜장(兒庵惠藏, 1782~1811)
대흥사의 12종사와 강사
 
표는 청허 휴정의 의발이 전해진 후 대흥사를 조선불교의 종원宗院으로 발전시키는데 혁혁한 공헌을 한 종사와 강사다. 이들은 편양 언기와 소요 태능의 후학들이기도 하다. 대흥사뿐만 아니라 이웃 만덕사萬德寺의 스님들이기도 하다. 당시 대흥사와 만덕사 간의 교류가 빈번했고 만덕사의 승려들일지라도 교학敎學에 탁월하면 대흥사에 머물면서 강사가 되었으며, 마침내 대흥사가 선교학의 종원으로 정착하는데 기여한 12강사로 추대된 것이다. 또한 “대둔사의 모든 요사寮舍에 방장실方丈室을 마련하고 강사를 모셔 공부하는 자가 살도록 하고, 명예가 혁혁한 강사가 있으면 반드시 모셔와 배우는 이로 하여금 잘 모시게 했다”고 한다. 때문에 대흥사는 “화엄대회華嚴大會에 수미首尾가 서로 계승하여 여러 스님들의 경 읽는 소리가 두륜頭輪의 산악을 흔들었다. 구름이 모여들어 침계류枕溪樓를 삼키니, 드디어 팔로八路의 승려 대중들이 대둔사로 귀의하여 다 종장宗匠이 되었다.” 이와 같은 상황으로 보아 대흥사의 화엄강회는 18세기를 중심으로 한 조선후기 불교계의 대표적인 화엄학 연구뿐만 아니라 그 발달을 이끌었던 원천이었을 것이다. 1810년대 대흥사가 『대둔사지』를 찬술할 때 다산 정약용뿐만 아니라 만덕사의 아암 혜장과 그 제자들의 기여를 고려한다면 대흥사와 만덕사를 중심으로 한 편양계와 소요계의 우호적인 교류 역시 짐작할 수 있다.
편양 언기는 위로는 스승의 혜명을 충실히 이어받았으며, 아래로는 후학양성을 통해 조선불교를 발전시켰을 뿐만 아니라 현대 한국불교의 명맥을 유지하게끔 하는데 공헌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