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솔바람 길에서 영혼의 진보를 이루어 보다

 


이서연
시인


자연은 보이지 않는 자리까지 솔직하다. 누구에게 발견되느냐에 차이가 있을 뿐 자연은 스스로 자신의 모습을 숨기지 않는다. 그러나 인간의 삶은 보이는 것과 다를 때가 많다. 내 안을 스스로 살펴보아도 겉모습과 내면의 상황이 다를 때가 많다. 일부러 감추거나 숨기는 것이 아닐지라도.
숲은 내가 의식하지 못한 거짓까지 보게 하는 힘이 있다. 피톨들이 숲의 기운처럼 푸른 빛이라도 되려는 듯 전신을 한 바퀴 도는 동안 맑아짐이 느껴질 때 어딘가에 숨어 있던 거짓된 언어들이 바람의 결 따라 사라진다. 물은 숲의 기운을 촉촉하게 녹여 본래 맑고 고요한 본성을 되찾아 사유에 갇혀 굳어진 영혼을 풀어내게 한다. 이 맛에 자연을 찾아 숲으로 들어가고 물을 따라가 보는 것이 아니겠는가.


충남 공주에는 크고 아름답다는 뜻을 가진 태화산泰華山이 있다. 백두대간 금북정맥의 줄기로 높지는 않지만 품이 커서 남북 방향의 산계와 능선 따라 평행으로 흐르는 하천이 원만하다. 이 지역이 십승지의 하나다. 십승지十勝地는 정감록, 징비록 등에 나와 있는데 산으로 첩첩 둘러 싸여 흐르는 공주의 유구천과 마곡천 사이도 하나 해당 된다. 물이 태극모양이나 S자로 흐르는 곳을 명당이라고 하는데 마곡사 지역이 그런 교과서적인 명당이라고 한다. 명당을 찾는 것은 전통사회에서 전쟁이나 난리가 났을 때 피신할 곳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난리를 피할 곳이 필요하다는 것은 그곳에서 몸을 보호한 후 다시 일어설 희망을 갖는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다시 말해 어려움을 극복하고 새로운 이상 세계를 향해 나갈 곳이 필요했다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마곡사 일대가 가장 적합한 곳임은 백범 김구 선생이 증명한 바 있다. 
1894년 동학혁명이 일어난 2년 뒤, 1896년에 명성왕후가 일본 자객들에 의해 살해된 데에 의분을 느끼고 황해도 안악군 치하포 나루에서 일본 장교를 죽인 이가 백범 김구 선생이다. 이 사건으로 체포되어 인천 형무소에 수감되었다가 탈출한 후 깊이 숨은 곳이 바로 마곡사였다.
소나무가 우거진 고즈넉한 숲길 따라 백범길, 명상산책길, 송림숲길 등 3개의 코스로 이루어진 솔바람 길을 산책하면 명상은 저절로 이뤄진다. 가을엔 갑사가 최고요, 봄에는 마곡사가 최고라는 말이 있을 정도로 마곡사는 봄풍경이 유명하지만 사철 솔향을 풍겨주는 솔바람길이 계절을 타겠는가. 고통도 즐거움도 인연에 의해 일어나는 게 이치다. 따라서 인연이 다하면 사라지는 것도 이치이므로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내가 그 인연에 흔들리고 있는가 하는 점이다. 앎에 매몰되어 혹은 삶의 안일함에 익숙하여 시나브로 마음에 때가 끼는 줄 모르고 산다. 계곡조차 명상하는 곳에 몸과 마음을 맡기는 습관, 어쩌면 사소할 수 있는 이 습관이 내 안의 우주를 움직이게 할 마법이 되지 않을까 믿어 본다.
 
오던 길 흔적일랑 찾지 말고 묻지 말라
가는 길 궁금해도 의심 없이 걸어가라
삶의 결 푸름에 물들이며 사랑으로 사랑하라
- <숲이 내게 말합니다> -
현재 태화산은 세계문화유산이 된 대가람 마곡사를 품고 있다. <태화산마곡사사적입안>에 따르면 자장율사가 중국 당나라에서 돌아온 후 창건하였으나 여러 차례 화재로 고려 중기 보조국사 지눌 스님에 의해 중건되었다고 한다. 임진왜란 때 대부분 소실되었다가 효종 때 각순 스님에 의해 옛모습을 찾았으나 다시 화재로 많은 건물이 소실되었다는 기록을 보니 목조건물이 긴 세월에 남아 있기가 참 어려운 일임을 느낄 수 있었다. 현재는 정조 때 재건된 대광보전과 헌종 때 개수된 대웅보전, 세조의 친필 편액이 걸린 영산전이 마곡사의 중심에서 문화재적 가치를 높이고 있다. 대웅보전은 2층으로 구성된 팔작지붕의 중층건물인데 위층 정면에 채광을 위한 빗살창이 인상적이다. 그 외 5층 석탑과 범종, 괘불, 세조가 타던 연, 청동향로 같은 것이 문화재로 보존되어 있다. 도량을 들어설 때 만나게 되는 천왕문, 해탈문부터 고찰의 위엄이 느껴지지만 백범 선생이 머물렀던 백범당과 응진전 등을 둘러보면 소박하면서 편안함이 느껴진다. 극락교를 들어서기 전 오른쪽에 서 있는 나무에서 종루를 바라보면, 계절마다 다른 멋으로 맛을 준다.
마곡사는 2018년 유네스코 제42차 세계유산위원회에서 ‘산사, 한국의 산지승원’이라는 명칭으로 1천 년 넘게 우리 불교문화를 계승하고 지킨 종합승원 7곳 가운데 하나로 그 문화적 가치를 인정받아 한국의 13번째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되었다. 이제는 우리만의 문화유산이 아니라 세계인의 유산이 된 만큼 더욱 잘 보존되어 가야 하는 의무와 책임이 생겼다고 할 수 있다.
마곡사 경내에서 김구 선생이 심은 향나무를 둘러보고 향나무 옆길로 빠져나가면 마곡사를 휘감고 흐르는 마곡천을 만나게 된다. 마곡천의 물소리를 따라 천천히 들숨과 날숨을 반복하다 보면 금세 백범 김구 선생 삭발터가 나온다. 그렇게 삭발 후 마곡사에서 계를 받은 백범은 백련암에서 한때 은거했다. 지금 백련암은 한 가지 소원은 들어주신다는 마애불을 만나러 가는 이들의 발길이 조용히 끊이지 않고 있다.
한편, 계룡산의 정기와 태화산의 정기가 집중되어 가장 좋은 정기를 받을 수 있는 곳이 마곡사 군왕대이다. 자연의 기운은 그 기운을 제대로 받는 이에게 가치가 있다고 본다. 삶의 속도를 조절하며 살아야 할 때 잠시 군왕대에 오르면 한 점 바람에서 위로를 받고 한 점 햇살에서 새로운 생기를 얻게 된다.
마곡사에는 ‘다루정’이라는 산사카페가 있다. 세상에 한 점 밖에 없는 수제 소품들을 보는 멋도 좋지만 창으로 바라보는 자연풍경이 눈을 숨 쉬게 한다. 절에서 직접 담갔다는 솔바람차와 오미자차는 녹음의 계절로 들어서는 시간에 만나서일까 유독 자연과 정성의 향기가 잘 빚어진 맛을 느끼게 한다.


솔향이 내어주는 바람의 자리마다
차향이 익는 것은 누구의 솜씨일까
가슴이 따라 익으니 차 한 잔이 법문이네
- <법문들은 차를 마시며> -


돌아보면 솎아내고 싶은 삶이 군데군데 있었다. 그러나 이미 지나간 일. 지금은 삶을 미리미리 솎아가며 사는 지혜가 필요하다. 그 한 단계 한 단계가 영혼을 한 뼘씩 진보시키는 과정이다. 산사는 자연과 하나 된 몸이다. 그 산사에서 빚은 차를 마실 때면 차 한 잔에 자연이 들어온다. 자연이 담긴 차 한 잔에서 다시 산사의 향기를 느낀다. 산사의 향기가 법문이다. 마곡사 솔바람길에서 솔향기 나는 차 한 잔 마시며 내 몸으로 법문을 들여 보낸다. 그 법문이 더러 솎아가면 살아갈 삶에 지혜를 열어주리라 믿기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