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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 공사상으로 초기 불교의 실천 덕목을 재해석

신규탁(연세대 명예교수, 철학 전공)



1.
󰡔범망경󰡕에서는 대승 수행자가 지켜야 하는 가치 덕목을 크게 넷으로 10항목씩 묶어, <10발취심>, <10장양심>, <10금강심>, <10지>를 단계별로 제시하고 있다. 필자는 4월호부터는 <10지>를 시작하기로 했다. 그런데 한국 불교계의 대부분 독자는 󰡔화엄경󰡕을 통해 <십지>라는 단어를 알게 되었을 것이다. 해서, 지난 5월호에는 󰡔화엄경󰡕이 세상에 등장한 연대와 기존에 유행하던 불교 문헌을 본떠서 만든 󰡔범망경󰡕이 세상에 유통된 저간의 사정에 대해서 간단하게 설명했다. 이렇게 하는 것이 󰡔범망경󰡕의 본문 이해에 도움이 되기 때문이었다.
이제 6월호부터 12월호까지는 <10지>의 본문 내용 중점적으로 소개하기로 한다. <10지>에서 다루는 덕목을 보면 모두 10개 조항으로 이루어져 있다. ①평등혜 체성지, ②선혜 체성지, ③광명 체성지, ④이염 체성지, ⑤혜조 체성지, ⑥체성 화광지, ⑦만족 체성지, ⑧불후 체성지, ⑨화엄 체성지, ⑩입불계 체성지이다.
①평등혜 체성지에 대해서는 4월호에서 소개했으므로, 이번 호에서는 간략하게 복습 정도로 설명하기로 한다. 한마디로 요약하면 보살이 실천해야 할 도덕 덕목으로 깨침을 완성한 뒤에 중생을 구호하는 활동을 제시하고 있다. 그러면서 깨침을 완성하기 위해 갖추어야 할 덕목으로 10력十力, 여래의 10호, 18불공법, 불국 정토에 머뭄, 무량한 대원, 변재무외, 일체의 학문과 그에 따른 일체의 실천, 등을 몸소 모두 완성할 것을 제시하고 있다. 여기까지는 대승불교 문헌에 일반적으로 등장하는 덕목이다.
이렇게 깨침을 완성한 다음에는 무량한 세계의 곳곳으로 다니면서, 중생들이 윤회하는 그곳으로 보살 자신도 몸소 들어가 그곳 중생을 구제하라고 한다. 이 과정에서 중요한 것은 일체가 공임을 아는 지혜, 󰡔범망경󰡕 본문에서는 이를 ‘공혜空慧’라고 하는데, 어느 경우에나 이런 지혜를 유지해 가야 한다는 것이다. <①평등혜 체성지>라는 제목에 나오는 ‘혜慧’가 바로 그것이다. 공의 지혜가 어느 곳에서나 ‘평등’하게 발휘된다는 뜻이다.


2.
위와 같이 <①평등혜 체성지>로 보살의 실천을 완수하고 나면, 다음 단계로 <②선혜善慧 체성지>의 단계로 진입한다. <②선혜善慧 체성지>에서 ‘선혜善慧’란, 말 그대로 ‘착한 지혜’라는 뜻이다. 󰡔범망경󰡕 본문에서는 ‘착한 지혜’를 대승 경전에 자주 등장하는 자·비·희·사慈悲喜捨의 지혜를 거론하고 있다. 그러면서 이 네 덕목은 “일체 공덕의 근본이다”라고 한다. 그런데 󰡔범망경󰡕에서 이와 같은 대승불교의 일반적 설명은 이 정도에서 그치고, 방향을 돌려서 초기 불교 교학에 등장하는 여러 가지 이론들을 대승적으로 승화시켜 설명한다.
󰡔범망경󰡕에서는 이상의 ‘자·비·희·사慈悲喜捨의 지혜’를 논함에, ‘4성제’의 이치를 제대로 보는 지혜를 갖출 것을 강조하고 있다. 이 점이야말로 󰡔범망경󰡕의 특징이다. 초기 경전과 대승 경전의 교리적 연결에 주목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초기 경전과 다른 점이 있다면 고성제苦聖諦를 설명하는 대목이다.


“첫째는 ‘철저하게 공인 줄 아는 지혜(大空慧)’인 방편으로서의 지혜 속으로 관찰해 들어가 모든 중생이 ‘고임을 아는 진리(苦諦)’를 본다. 모두가 ‘알음알이의 마음(識心)’이 있기 때문이니, 3악도에서 칼에 찔리고 몽둥이로 매맞는 등의 일체 고뇌를 겪는 속에서 ‘알음알이(識)’가 생기는 것을 고제苦諦라 한다.”


특이한 점은 ‘알음알이(識)’가 고苦의 시발점이라는 것이다. 그것이 ‘무명’이라는 것이다. 이렇게 ‘고성제’를 설정한 󰡔범망경󰡕에서는 ‘집성제’와 ‘도성제’를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다시, 무명 때문에 무량한 마음을 모아 일체 업을 짓고, 그러기를 상속하고 서로 이어가 습인(習因 습관으로 굳어진 원인)이 되고 집인(集因 모여서 굳어진 원인)이 되는 것을 관찰하니, 이를 이름하여 괴로움의 원인은 집착이라는 진리인 집제集諦라고 한다.
정견으로 해탈하여 아공我空이며 법공法空인 지혜의 도를 마음마다 이어지게 함을 이름하여 지혜로써 도를 삼는 도제道諦라고 한다.”


‘도성제’를 설명하는 부분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수행의 방법으로 제시된 덕목은 아공과 법공의 지혜를 닦는 것이다. 대승불교, 그중에서도 반야부 계통의 교학 이론이 물씬 풍기는 대목으로, 󰡔범망경󰡕은 반야부 계통의 영향을 받은 것임을 알 수 있다. 그런데 ‘멸성제’를 설명하는 대목을 보면 여래장 사상을 수용하는 흔적이 있음도 알 수 있다.


“‘유(有, 󰇞 bhava)’의 과보를 다하고 ‘유有’를 초래하는 원인도 사라져, 청정하게 한 맛으로 비춘다. ‘체성(體性 본바탕에 갖추어진 성질)’인 미묘한 지혜에 의해 적멸한 하나의 진리에 도달한다. 혜품慧品을 구족하는 것을 근根이라 한다. 일체 지혜의 성품은 공空에서 생겨 관觀으로 들어간다. 이것이 첫째의 선근이다.”


“盡有果報하고 盡有因하여 淸淨一照하며 體性妙智로 寂滅一諦하니라 慧品具足을 名根이라 하니 一切慧性이 起空入觀이니 是初善根이니라.”


원체 문장이 난해해서 한문 원문을 나란히 소개한다. 특히 주의가 필요한 부분은 “체성묘지體性妙智로 적멸일제寂滅一諦하니라”이다. 그중에서 “체성묘지體性妙智”를 필자는 ‘오묘한 지혜가 중생들의 본바탕에 성품으로 간직되었다.’라는 뜻으로 이해했다. 독자 여러분은 어떻게 이 대목을 읽으실지요?


3.
이상으로 ‘4성제’를 제대로 아는 지혜를 <②선혜善慧 체성지> 단계에서 실천하는 것을 살펴보았다. 다음, <②선혜善慧 체성지> 단계에서는 ‘버림(捨)’의 실천을 제시하고 있다. ‘버림(捨)’의 수행에서는 지·수·화·풍地水火風의 4대로 이루어진 이 육신을 떨쳐버리고, 진리의 몸인 법신法身을 갖추는 실천 단계이다. 중생들은 자신들이 지은 업에 따라 구분 지어진 일생을 살게 마련이다. 이것을 분단생사分段生死라고 하는데, 지혜를 완성한 보살 등은 미세한 번뇌가 제거되어 상태가 변하는 변역생사變易生死의 삶을 산다고 한다. <②선혜善慧 체성지>에서는 ‘버림(捨)’의 실천을 통해 생사의 모습이 차원이 달라지는 단계를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둘째로 일체의 탐착을 버리며 일체가 평등하고 공한 줄을 알아 ‘버림(捨)’ 실천을 관찰한다. 어떤 반연도 맺지 않아 모든 법이 ‘공의 본제(空際)’와 한 모양임을 관찰하되, 내가 보건대, 일체 시방에 있는 대지의 흙은 모두 나의 옛 몸이 수용하던 옛 땅이고, 네 곳의 큰 바다의 물도 곧 내가 수용했던 옛 물이고, 일체의 겁화劫火도 나의 옛 몸이 옛날에 수용했던 불이고, 일체의 풍륜風輪도 내가 옛날에 수용한 기운이다.
나는 이제 이 지위에 들어가 법신을 원만하게 구족하고 나의 옛 몸을 버려, 끝내는 4대로 이루어진 분단생사分段生死하는 부정한 옛 몸을 받지 않겠다고 한다. 이것이 ‘버림(捨)’의 실천 덕목을 갖추었다고 한다.”


4.
<②선혜善慧 체성지>의 수행 단계에서 실천할 덕목으로 첫째는 ‘4성제’를 제대로 관찰하는 지혜, 둘째는 ‘버림(捨)’의 실천을 보았다. 마지막으로 셋째는 중생을 어여삐 여기는 ‘자慈’의 실천이다. 자慈’의 실천에 대해 󰡔범망경󰡕 본문에서는 이렇게 설명하고 있다.


“셋째로 차례로 관찰하기를, 교화 대상인 일체 중생에게 인천人天의 즐거움과, 10지의 즐거움과, 10악의 두려움을 떠나는 즐거움과, 묘화삼매妙華三昧를 얻는 즐거움과, 나아가 부처의 즐거움에 이르기까지의 것을 관찰하는 것이다.
이같이 관찰하는 것을 ‘자비(慈)’의 실천 덕목을 모두 갖추었다고 한다. 보살은 이때, 이 지위에 머물러 어리석음도 없고 탐욕도 없고 성냄도 없어 평등한 하나의 진리로 들어가니, 모든 수행의 근본이다. 부처님의 일체 세계에 노닐며 무량한 법신을 나타내어 교화한다.”


위의 본문도 내용이 난해하다. 관찰하는 대상은 중생의 수행과 그에 따른 행복 누림이 높아지는 것이다. 중생들이 점점 수행을 쌓아가면, 인간과 천상에서 누릴 수 있는 최고의 즐거움을 누리고, 10지의 즐거움을 누리고, 10악의 괴로움이 사라지는 즐거움을 누리고, ‘묘화삼매妙華三昧’를 얻는 즐거움을 누리고, 끝내는 부처가 되는 즐거움을 누리는데, 보살은 이런 광경을 ‘자慈’의 마음을 가지고 관찰한다는 내용이다.
이렇게 해서 <②선혜善慧 체성지>에서 닦아야 할 수행 덕목으로, 첫째는 ‘4성제’를 제대로 관찰하는 지혜, 둘째는 육신의 ‘버림(捨)’과 법신의 완성, 셋째는 중생들이 수행 잘해서 즐거워하는 것을 ‘자비(慈)’의 마음으로 관찰하는 것을 소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