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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름날 둠벙에서

최선옥
구룡사불교대학 22기


오랜만에 고향을 찾아 논둑을 따라 걷다 보니 어린 시절이 주마등처럼 아스라이 눈앞에 펼쳐진다. 꼬맹이 나는 양은 대야에 양말과 흰 고무신을 담아 둠벙으로 빨래를 하러 갔다.
소금쟁이가 물을 가로지르며 수영 솜씨를 뽐내고, 물방개는 사랑놀이 중이다. 짓궂게 방개의 등에 물 몇 방울을 떨어뜨렸더니 잽싸게 도망갔다. 볏짚을 돌돌 말아 수세미를 만들어 고무신을 닦아놓고 양말을 빠는데, 양잿물로 만든 시커먼 개똥비누가 나의 고사리 손에 비해 너무 크다. 양손으로 비누를 쥐고 빨래에 문지르다가 물속에 톰방 빠뜨렸다. 나는 화들짝 놀랐고 방개도 깜짝 놀라 수초 속으로 헤엄쳐 숨어버린다.
깨끗이 닦아놓은 하얀 신발을 마루 끝에 나란히 엎어놓았다. 부모님이 깨끗한 신발을 신으실 생각에 내 마음도 상쾌했다.


어린 시절 우리 마을에는 30여 가구가 옹기종기 모여 사는 시골동네였다. 논가 둠벙에서 우리동네 사람들이 모든 빨래를 다 했는데, 흐르는 물이 아니기 때문에 더러워지다가 하룻밤이 지나면 좀 맑아진다. 그래도 날이 갈수록 물이 탁해져만 갔다.
어쩌다 한 번씩 둠벙을 청소하는데, 동네 청년들이 두레박질을 해서 물을 퍼내면 바닥에 팅팅 불은 비누도 있고 동전도 나오고 손바닥 만 한 붕어도 많았다. 다른 곳에서 잡은 붕어보다 훨씬 통통한 게 아마도 갓난아기들의 응가덩어리를 먹고 자라서가 아닐까? 지금 생각하면 완전 자연산이다.
음식솜씨 좋은 아주머니들이 마당가에서 흙벽돌 위에 솥단지를 걸고, 감자랑 호박을 넣어 붕어매운탕을 끓이고, 아저씨들은 쑥대를 베어다가 보릿꺼럭과 탑세기 위에 올려놓아 모깃불을 만든다. 하루의 해가 뉘엿뉘엿 기울어질 때쯤이면 붕어매운탕 냄새가 동네 안에 진동을 한다.
동네사람들은 느티나무 아래에 깔아놓은 밀대방석에 앉아 붕어매운탕에 곡주를 드시며 흥겨운 노랫가락에 장단을 맞춘다.
“두만강 푸른물에 노젖는 뱃사공 ~ ”
아이들도,
“여우야! 여우야! 뭐 하니? 밥 먹는다. 무슨 반찬? 개구리 반찬.”
하면서 한창 뛰놀다 보면 배가 출출해 진다.
엄마는 모기잿불에 묻어 놓았던 구운 감자를 꺼내어 제비가 새끼의 입에다 먹이를 넣어주듯 호호 불어서 내 입속에도 넣어주신다,
강낭콩도 껍질째 잿불에 넣어놓으면 맛있게 익는데 콩알은 빼먹고 그을린 콩껍질로 얼굴에 안경도 그리고 수염도 그리며 깔깔대며 웃으면 엄마는 “뭐가 그렇게 재밌냐” 하시며 우리들의 몰골(얼굴)을 보시고는 “너희들 때는 가랑잎 굴러가는 것만 봐도 웃음이 나올 때다. 참 좋을 때여.” 하셨는데 엄마의 목소리가 그립다. 
낮에 봉숭아꽃을 따서 백반을 넣어 조약돌로 콩콩 찧어놓은 것을 손톱에 올려놓고 아주까리 잎으로 감싸서 실로 꼭꼭 묶어주었는데, 엄지와 검지 손톱에는 물을 들이지 않았다. 왜냐면 엄지 검지에 봉숭아물을 드리면 아빠, 엄마가 빨리 돌아가신다는 이야기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잠을 자다가 빠지면 이브자리에 물이 들어 엄마한테 야단맞을까 봐 손가락이 아팠지만 꾹 참았다.
밤은 깊어가고 아저씨들은 거나하게 취해서 한 소리 또 하고 한 소리 또 하고 하다가 시비가 붙어 옥신각신 하고…. 결국엔 큰 소리가 나고, 다시는 안 볼 것처럼 씩씩 거린다.
우리들은 귀신이야기에 귀를 쫑긋 세우고 있는데 엄마가 “이젠 집에 가자.” 하신다.
엄마와 함께 집에 가지 않으면 귀신이 나타날까 봐, 엄마 손을 꼭 잡고 집으로 향하는데, 달님이 나를 따라오면서 길을 훤히 밝혀 주었다.
손톱엔 빠알~간 물이 들어가고 소쩍새 노랫소리와 함께 밤새도록 둠벙에는 새로운 물이 고이고, 모깃불 연기는 아침까지 퐁퐁 피어올랐다,
그 여름날 함께 했던 부모님과 동네어른들이 이젠 많이 돌아가셨고, 어느새 내 소꿉친구들의 머리가 희끗희끗 해지고 있다. 
그동안의 새마을운동 등 경제 발전과 함께한 농지정지작업에 따라 바둑판식 논으로 바뀌었고, 논둑길은 시멘트로 포장이 되어 있었다. 동네 아낙네들로 왁자지껄했던 둠벙은 흔적조차 없어져 아쉽다. 어린 시절에는 꾸불꾸불 조성된 논둑, 초가집, 스레이트집과 함께 먹을거리도 부족하고, 위생상태가 나빠서인지 종기, 눈다락지, 머리뗌빵이 많았지만 그때 그 시절이 그립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