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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선에 대한 반성과 극복

최윤필
한국일보 기자


조선 건국 이후 임진왜란까지의 역사를 ‘위선僞善’의 프리즘을 통해 조망한 <조선 지식인의 위선>이란 책이 있습니다. 책에는 당대 위정자나 사림 당파가 자신들의 사욕을 어떻게 그럴싸한 명분으로 치장했고, 권력 투쟁으로 얼마나 참담한 오점을 남겼는지 비교적 소상히 기술돼 있습니다. 개국공신들의 탐욕, 개혁을 빙자해 반대 세력을 제거하는 사례, 현실을 무시한 이념의 선동정치…. 위선은 가면을 쓴 탐욕이고, 위선의 끝은 역사와 국가, 공동체의 희생을 낳게 된다는 게 책의 요지였습니다.
위선의 해악은 주변에도 흔합니다. 공동체의 위선이 개인의 행복을 억압하고, 개인의 위선이 공동체의 결속을 해하는 예도 흔히 찾아볼 수 있습니다. 위선은 선의 외투를 걸치고 있어 쉽게 간파하기도 힘들뿐더러, 명분의 외투에 저항하자면 용기가 필요할 때도 있습니다. 현실을 앞세워 명분의 양보를 요구하다 보면 그릇된 현실까지 긍정해버리는 타협주의자나 기회주의자로 낙인찍힐 수도 있습니다. 병자호란 당시 청나라에 끝까지 맞서자던 주전파와 달리 화친을 주장했던 관료들의 운명이 그 예가 될지 모르겠습니다. 역사에서 가정假定은 무의미한 일이겠지만, 만일 주전파의 뜻대로 조선이 청병에 끝내 맞섰다면 더 참담한 희생을 감당해야 했을 것입니다. 물론 당대의 주전파가 위선자는 아닐 것입니다. 하지만 현실을 무시한 채 명분과 자존심에 공동체의 운명을 거는 것은 지도자로서 바람직한 태도라 하기 힘듭니다. 어쨌건 주화파는 당대는 물론 이후로도 오랫동안 적에 투항해 왕을 욕보인 무리로 성토됐다고 합니다.
한국 사회의 뿌리 깊은 위선 가운데 하나로 성性에 대한 인식과 도덕률이 있습니다. 현대 사회는 공동체적 규범가치보다 개인의 행복추구권을 존중하는 방향으로 진보해 왔습니다. 혼인빙자간음죄나 간통죄가 폐지된 것도 그 예일 것입니다. 보수적인 법률조차 시대 추세에 따라 변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지만 인식의 한 켠에는, 또 일반 법과 제도의 장막 속에는 저런 움직임에 대한 저항 기제가 여전히 강하게 남아있습니다. 영화 장면 속에 과도하게 등장하는 모자이크 화면과 시대착오적인 음란 시비, 로맨스와 불륜의 이중 잣대 등도 그런 예일 것입니다.
그처럼 성에 대한 인식과 규범들은 우리의 현실과 사뭇 동떨어져 있습니다. 주택가를 조금만 벗어나도 매춘과 유사매춘 업소들이 즐비합니다. 스마트폰 사용이 보편화되면서 누구든, 언제 어디서든, 포르노 영상과 사진을 볼 수 있습니다. 일상화된 밤문화, 음주문화, 접대문화, 잊힐 만하면 터져 나오는 유명인들의 성 추문. 인터넷이나 영화, TV의 상업광고나 드라마만 봐도 성적 수치심을 자극할 만한 내용이나 장면들이 적지 않습니다. 그런 현실에도 불구하고 성 보조기구를 원칙적으로 불법화하고 있는, 지구상의 드문 나라 가운데 한 곳이 한국입니다. 
10대 청소년의 성문화도 마찬가지입니다. 청소년 성문화는 어른 세대가 상상하기 힘든 속도와 보폭으로 서구화, 개방화해 왔습니다. 한국청소년상담복지개발원이 최근 이성교제 관련 상담 500건을 분석한 결과 10대 청소년들은 짝사랑(26.4%), 이성 친구와의 이별 후유증(18.2%), 이성과의 관계 지속 어려움(15.2%), 이성을 대하는 방법(9.4%), 성관계(8.0%) 등 다양한 고민을 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성 경험자의 첫 성관계 연령이 평균 13.6세라는 조사 결과도 있었습니다.
급기야 한 외국어고등학교는 교내에 ‘이성교제 신고함’이라는 걸 설치, 교제 사실이 적발된 학생에게는 반장 직을 박탈하거나 전학, 교내봉사 등 벌칙을 내리고 있다고 합니다. 2010년 한 청소년인권단체가 공개한 어떤 학교의 교칙에는 이성친구와의 어깨동무나 팔짱을 끼면 벌점 15점, 포옹하면 30점, 키스하면 50점, 이성교제 3번 적발 시 퇴학 등이 있었습니다.
성인의 입장, 아니 부모 입장에서 보자면 공부와 이성교제의 권리 가운데 공부가 우선이라고 생각하기 쉬울 것입니다. 그리고 저 학교들처럼 ‘무조건 안 돼’라고 말하고 싶은 이들도 적지 않을 것입니다.
저는 성인들의 문란한 밤 문화, 청소년들의 조숙한 성 문화를 긍정하고 존중하자는 말을 하자는 게 아닙니다. 청소년 성 전문가들은 교칙으로 억압하고 ‘우리 학교는 성의 안전지대’라는 식으로 호도할 것이 아니라 개인들의 자발적인 선택을 통해 스스로 성을 절제하도록 교육 방향이 전환돼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연합뉴스 보도에 따르면 최근 한국청소년상담복지개발원에서 열린 ‘감춰진 10대의 이성교제’ 연구발표회에서 서울시립청소년성문화센터 이명화 소장은 “학교에서는 연애가 금기로 돼있지만 10대들은 끊임없이 연애를 갈망하며 법의 경계를 넘나들면서 연애와 성을 경험한다”며 “청소년들의 건강한 연애를 위해서는 성적 자기결정능력을 키워줘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이 소장에 따르면 네덜란드의 경우 30여 년 전 10대들의 무분별한 성관계와 임신이 사회문제로 부각됐지만 이후 초등학교 때부터 소통 중심의 성교육 프로그램을 체계적으로 운영, 당시 12.4세이던 평균 성관계 연령을 최근 17.7세로까지 높였다고 합니다.
청소년의 성은 학업에 부정적이니 법이나 교칙 등을 통해 무조건 금해야 한다는 발상의 이면에는 현실을 무시한 폐쇄적이고 이중적인 성문화의 그림자를 보게 됩니다. 그 위선의 벽을 허물고 넘어서야만 바람직한 해법이 보일 것이라는 의미입니다. 모든 억압과 금기는 위반과 유혹의 그림자를 거느립니다.
종교의 위선 역시 사회에 끼치는 해악이 적지 않다고 합니다. 성직자의 권위적 지배, 개신교회의 세습과 물질 추구 등도 두 얼굴의 베일 뒤에서 이루어지는 폐습입니다. 최근 열린 ‘2013 만해축전 학술세미나’에 발표자로 나선 한국기독교연구소 정연복 편집위원은 한국 교회가 한국전쟁 이후의 트라우마를 치료하는 과정에서 공산주의를 속죄양으로 삼고, 정권의 반공 국시에 편승해 세계적으로 유례없는 성장세를 구가함으로써 친미 반공 이데올로기에 뿌리를 두고 파시즘화했다고 비판했습니다. 보수 교단의 뿌리깊은 성차별주의와 국가주의, 권력 독재와 부의 독점 등은 예수나 예수 운동이 지향하던 바와 정반대의 길이라는 것입니다. 교회들이 내적으로는 신도, 외적으로는 사회와 소통함으로써 도덕적 권위를 획득하기보다 이데올로기적 도그마의 권위로 신도 위에 군림하는 것은, 성서의 의미를 해석하는 권위를 선언적으로 독점함으로써 스스로 신의 권능을 누렸던, 그럼으로써 중세 유럽을 광신과 공포의 도가니로 몰고 갔던 종교지도자 칼뱅의 위선과 다르지 않을 것입니다.
교회의 실질적인 리더격인 목사와 장로에 대한 평가 및 통제시스템 부재와 소수가 은밀히 결정하는 교회 재정과 회계 시스템, 교회 재산 세습 문제 등도 그 뿌리에는 위선이 있습니다. 교회 세습을 강력히 비판해온 소망교회 김지철 담임목사는 최근 열린 한 특강에서 “목회자들은 장로의 비판적 질문을 막고 성도들의 질문을 막으면서 절대적 순종을 요구하는 우민愚民정책을 펴왔다”며 “이는 옛날의 독재자들이 자신을 택하지 않으면 불안해지고 망한다면서 국민에게 선택을 강요한 것과 다르지 않다”고 성토했습니다.
주류 교단의 위선에 대한 교회 개혁론자들의 저 같은 성토와 요구는 교회 못지않게 개혁 과제가 산적한 불교 종단도 귀담아 들어야 할 것입니다.
위선은 인간의 특성이기도 합니다. 인간이기에, 부끄러움을 알기에 위선도 있겠기 때문입니다. 또 어떤 위선은 좋은 과실을 맺게도 합니다. 그래서 내면의 영역인 의도를 따지기보다 결과로서의 드러냄을 평가해야 한다는 의견도 있습니다. 하지만 인간이기에 위선에 대한 반성과 극복 노력도 기울일 수 있을 것입니다. 노르웨이 오슬로 국립대에 있는 박노자 교수가 현지 시인 에를링 키텔센과 함께 한중일 고승들의  ‘임종게’를 두고 대담한 책 《모든 것을 사랑하며 간다》에는 원오 극근선사의 임종게가 소개돼 있습니다.
“아무 것도 해놓은 것 없거니 임종게를 남길 이유가 없네.”
매 순간 저런 마음을 환기하며 살 수만 있다면 위선의 얄팍한 광채 따위에 현혹되지 않을 것 같기도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