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성범
숲해설가
서울의 신촌 봉원사 경내에는 450년 된 느티나무가 있다. 이곳의 느티나무는 봄이면 연둣빛 싹을 띄워 봄을 장식하고, 가을에는 붉은색 또는 짙은 커피색 단풍으로 지극히 아름다운 풍경을 이룬다. 어떤 느티나무는 아주 샛노란 잎으로 단풍이 들기도 하여 의외로 산뜻한 기분을 되살려 준다.
느티나무에서 매미 소리가 요란하면 한더위다. 나무 아래 자리를 깔고 누워 있으면 바람결에 흐르는 매미소리와 함께 금세 잠에 빠진다. 예나 지금이나 여름의 휴식처로 느티나무만 한 것이 어디 있겠는가. 시원한 느티나무 아래에 있으며 나른한 졸음이 오고 잠깐이나마 노동에서 오는 피로를 풀기에도 좋다.
느티나무는 우리 민족에게 정자목으로 맞춤이었다. 느티나무는 상부가 퍼진 형태로 자라기 때문에 무성한 가지와 잎으로 시원한 그늘을 만들어 준다. 우리나라 정자나무의 약 80%가 느티나무인 이유는 이 나무가 만들어 주는 특별한 그늘 때문이다.
시원한 정자나무 밑으로 마을사람들이 모이듯 그 마을에서 가장 크고 오래된 느티나무는 당산나무 역할도 하여 민초들이 속내를 풀어내고 소원을 비는 장소가 되기도 하였다. 서양에서 월계수를 신성시하듯 한국에서는 느티나무를 신령한 나무로 받든다. 때로는 영목(靈木)으로, 귀목貴木으로, 신목神木으로 으뜸의 나무다.
「산림경제」를 보면 “느티나무 세 그루를 중문 안에 심으면 세세부귀를 누린다. 신방 서남간에 심으면 도적을 막는다”고 실려 있다. 과거에는 마을마다 동구 밖에 한두 그루의 큰 느티나무가 심어져 있기 마련이었다.
금기와 전설도 갖가지다. 옛날부터 잎이나 가지를 꺾으면 노여움을 사서 재앙을 입는다고 하여 얼씬도 못하게 하였다. 이것이 아름다운 나무 모양과 긴 수면을 유지시킨 비결이 되었으리라. 전설을 만들어 금기를 역작용으로 나타나게 하여 함부로 베지 못하게 한 지혜이다.
봄에 느티나무에 일제히 싹이 트면 풍년이 들고 그렇지 못하면 흉년이 든다고 예언하기도 했다. 위쪽에서 먼저 싹이 트면 풍년이고 아래쪽에서 먼저 싹이 트면 흉년으로 보기도 했다. 지방에 따라서는 사내아이를 얻는다는 전설이 많아 아낙네들의 소원목이 되기도 했다. 밤에 나무에서 광채가 나면 동리에 행운이 온다고 여겼고 나무에서 우는 소리가 나면 불행이 온다고 믿어 두려워하기도 했다. 그래서 사람들은 노거수인 느티나무 앞에서 정월 보름에 제사를 지냄으로써 마을의 무사안녕을 빌었다. 전염병이 유행하면 제사를 올려 병마와 액운을 물리쳤다. 대부분의 느티나무 노거수에는 이처럼 제각기 전설이 깃들어 있기 마련이다.
그 나무가 있는 마을에서 태어난 위인의 이야기가 얽혀 있거나 나무를 심은 사람을 신격화하기도 했다. 퇴계 이황 선생의 경우 뜰에 심은 느티나무 줄기가 시드는 것을 보고 앞으로 자신에게 곤란한 일이 닥칠 것을 예감하기도 했다고 한다. 예감은 적중하여 후에 을사사화에 연루되어 파직되었으나 다행히도 복직되었다. 느티나무와의 교감을 통해 앞일을 예견했던 셈이다.
느티나무는 5월에 잎겨드랑이에서 녹색의 꽃이 피고 열매는 가을이면 익는다. 모두가 녹색이어서 주의해서 보지 않으면 눈에 잘 띄지 않는다. 느티나무의 매력은 가을의 단풍이다. 보통 노랗게 단풍이 드는 것이 많지만 개체에 따라 선명한 붉은 색으로 물드는 것도 있다. 이런 개체를 잘 선발하여 가꾸면 가로수, 공원용수, 조경수로 좋다.
느티나무는 결이 고와서 고급 가구를 만드는데 더할 수 없이 좋은 목재다. 불상도 만들고 집의 기둥과 가구의 재료가 되었다. 흔히 볼 수 있는 나무뿌리로 만든 큰 탁자는 느티나무 줄기와 뿌리가 만나는 부분의 목재로 만든 것이다. 뒤틀린 정교한 나뭇결을 구름무늬라 부르기도 했다.
유득공의 『경도잡지』에는 4월 초파일 풍습에 느티떡을 해 먹는다고 적혀 있다.
“손님을 초청해 모셔 놓고 음식을 대접한다. 느티떡, 볶은 콩, 삶은 미나리 등을 내놓는다. 이를 두고 부처님 생신날 먹는 맨밥이라 한다.”
고기를 일체 먹지 않기 때문에 느티나무, 느릅나무, 시무나무 같은 싹을 따다가 쌀가루에 버무려 떡을 쪄 먹었던 것이다. 4월 초파일경이면 느릅나무과 식물의 새싹이 돋아난다. 떡타령에는 4월에 먹는 떡을 느티떡이라고 했다. 느티나무, 느릅나무 싹은 이때 가장 부드럽고 향기로웠다. 이 떡타령을 보면 제철에 나는 여러 가지 것들을 데치고 말려서 떡을 해 먹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사월 파일 느티떡에
오월 단오 수리취떡
유월 유두 밀전병이라
떡 사시오 떡 사시오
전한의 회남왕 유안이 쓴 『회남자』에는 느티나무를 9월의 나무에 넣었다. 계절마다 나무 한 가지씩을 선정했는데 1월 버드나무, 2월 살구나무, 3월 자두나무, 4월 복사나무, 5월 느릅나무, 6월 가래나무, 7월 소태나무, 8월 산뽕나무, 9월 느티나무, 10월 박달나무, 11월 대추나무, 12월 상수리나무다.
과거 전라북도 전주성 주위에도 느티나무 고목이 많았던 것 같다. 석북 신광수는 그의 시 ‘전주 남문루’에서 다음과 같이 노래했다.
성을 끼고 선 느티와 버들에 보슬비 내리고
성 위 높다란 누각으로 제지가 날아든다
봄철 그 화려했던 꽃들이 떨어지면 신록의 느티나무 밑을 찾게 된다. 한여름의 그늘은 역시 느티나무 밑이다. 시원한 그늘에서 듣게 되는 매미 소리 또한 느티나무여야 운치를 더한다. 신위는 울긋불긋한 꽃이 눈을 어지럽게 하고 머리까지 혼란스럽게 했던 때가 오래되지 않았는데 벌써 느티나무 잎이 자라는 여름이 되었다고 노래했다.
천연기념물로 지정되어 보호받고 있는 느티나무도 많다. 은행나무 19건, 소나무 17건에 이어 세 번째로 많이 지정되었다.
나무와 나무는 서로 어우러져야 잘 자라는 것이 있는가 하면 가까이 있으면 양쪽 다 자라지 못하는 것도 있다. 느티나무와 머루 덩굴은 궁합이 잘 맞는 식물로 알려져 있다. 느티나무에 기어오른 머루덩굴은 많은 열매가 달리고 세력도 좋다. 머루는 느티나무에 의지해 사는 대신 다른 덩굴식물이 가까이 오지 못하도록 강력한 물질을 품어낸다고 한다. 느티나무와 머루덩굴이 어떤 계약이라도 맺었는지 흥미롭다.
봉원사 경내가 아늑하고 한적하게 느껴지는 것은 느티나무 같은 노거수가 우거져 있고 숲이 잘 발달되어 있기 때문이다. 느티나무 새싹이 돋아나는 신록의 계절은 희망이요. 여름의 짙푸른 녹음은 온 몸을 시원하게 한다. 게다가 줄기차게 울어 대는 매미들의 합창은 폭포 소리처럼 웅장하면서도 귓속에 남은 소음 찌꺼기들을 씻어 내린다. 가을은 가을대로 멋있다. 단풍이 들면 그야말로 경내가 온통 꽃밭이다. 붉게 물든 잎들이 하나 둘 떨어질 때마다 속세의 번민도 하나 둘씩 내려놓을 수 있을 것만 같다. 그러다 봉원사 느티나무도 끝내 모든 욕망을 떨쳐 버리고 나목으로 돌아가 긴 겨울을 준비한다.
처서가 지나 가을 초입이다. 느티나무를 만나러 가 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