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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나무, 비움의 큰 스승

홍성범
숲해설가


대나무는 늘 경계 위에 서 있는 존재다.
풀인가, 나무인가. 식물학적으로 대나무는 벼과에 속하는 풀이다. 하지만 우리의 눈에는 키 높고 굳센 나무다. 풀이라고 하기에는 너무나 당당하고 나무라 하기에는 어쩐지 가볍고 유연하다. 그 모호함 속에서 대나무는 자신만의 자리를 지켜왔다.
대나무 외에도 분류가 어려운 존재들이 꽤 있다. 조류와 포유류 사이의 박쥐가 있고, 포유류와 어류 사이에는 고래가 있다.
이처럼 자연에는 이분법적인 사고방식으로 나눌 수 없는 존재가 무수히 많다. 은행나무도 침엽수의 특징과 활엽수의 특징을 한 몸에 지니고 있다. 어떤 구획에 갇힘이 없이 그저 자신만의 방식대로 나름의 삶을 꾸려가고 있는 것이다. 모든 문제를 자신이 정한 틀 안에서 해석하고 규격화된 공식 안에 가두고자 하는 인간의 어리석음을 비웃는 존재들이다.
마을 뒤 대숲은 여름에는 시원하고 겨울에는 바람을 막아 주며 토사물이 흘러오고 산짐승이 뛰어드는 것을 막아주었다.
대나무는 밀집하여 생육한다. 한여름 대숲에 가 보자. 줄기가 보이지 않을 정도로 빽빽하게 서 있다, 눈이 시원하고 환해진다. 땅에 떨어진 댓잎들은 푹신하게 밟힌다.
하늘로 쭉쭉 뻗은 대나무가 가지런히 서 있으면 녹색 그물망 같고 그물망은 대숲에 부는 바람을 한 뜸 길들여서 보낸다. 눅눅한 것을 거뜬하게 바꾸어 숲의 소리와 공명한다. 비가 오면 빗방울은 댓잎에 뛰노는 데 그 소리는 기분을 좋게 한다.
봄이 오면 대나무는 땅속에서 순을 내밀어 불과 며칠 만에 사람 키를 훌쩍 넘는다. 왕대나무는 한 달 남짓한 기간에 수 미터까지 치솟는다.
우리는 흔히 ‘성장’이라는 말을 천천히 쌓아 올려가는 과정이라 여기지만 대나무는 마치 기다림 끝에 한꺼번에 터져 나오는 폭발 같은 성장을 보여준다. 땅속에서 오랫동안 뿌리를 뻗으며 힘을 축적하다가 어느 순간 마침내 그 힘을 모두 표출하는 것이다. 눈에 보이지 않는 준비의 시간을 거쳐야만 눈부신 도약이 가능하다는 사실을 대나무는 묵묵히 가르쳐 준다.
대나무의 진정한 매력은 곧게 뻗은 몸과 속이 빈 줄기에 있다. 줄기는 단단하고 매끈하며, 속은 비어 있어 바람을 품는다. 그 비움 덕분에 더 가볍고 더 단단하다. 바람이 불어와도 꺾이지 않고 오히려 흔들리며 바람을 흘려보낸다. 눈이 쌓이면 잠시 고개를 숙였다가 다시 일어나 하늘을 향한다. 속이 비어 있기 때문에 더 강하고, 비움으로써 더 큰 가능성을 품는 것이다. 이 단순한 구조는 오래전부터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매화, 난초, 국화와 함께 사군자의 하나로 꼽히는 것도 그 때문일 것이다. 매화가 한겨울 눈 속에서도 꽃을 피워 절개를 상징하고, 난초가 은은한 향으로 고결함을 나타내며, 국화가 늦가을의 스산한 바람 속에서도 의연하게 피어나듯, 대나무는 꺾이지 않는 강직함과 속이 빈 겸허함으로 군자의 덕목을 보여준다. 사군자는 단순한 그림 소재가 아니라, 선비들이 마음속에 품은 삶의 지향이었다. 그 가운데서 대나무는 바람과 눈보라에 맞서 지조를 지키는 기개이자 비움으로써 참된 힘을 얻는 지혜였다.
옛사람들의 기록 속에는 대나무와 관련된 일화가 많다.
중국의 문호 소동파는 “대나무가 없으면 살 수 없다”라고 말했다. 그것은 단지 대나무를 좋아한다는 뜻이 아니라 대나무가 정신적 버팀목이었다는 고백이다. 우리나라의 선비들도 집 둘레에 대숲을 가꾸었다. 그 푸른 기운 속에서 자신을 다스리고 세상의 풍파 속에서 마음을 붙잡았다. 바람에 흔들리되 꺾이지 않는 그 모습은 곧 세속의 유혹과 권력 앞에서도 지조를 잃지 않으려는 다짐이었다.
대나무만큼 유연하고 멋스럽게 우리의 의식주 안에 깊숙이 들어 온 식물도 많지 않다. 줄기는 집을 짓는 기둥이 되었고, 장비와 생활도구를 만드는 재료가 되었다. 피리와 대금 같은 악기는 대나무 없이는 존재할 수 없다. 그 소리는 바람에 흔들리는 대숲의 속삭임을 닮아 사람들의 마음을 위로했다. 애잔한 피리 소리에는 슬픔이, 호탕한 대금 소리에는 기쁨이 담겼다. 사람들은 대나무의 울림 속에서 자신의 감정을 비추었고 그것을 통해 삶의 무게를 덜어냈다.
대나무는 건강에도 유용하다. 최근 산림청의 조사에 의하면 피톤치드 함유량이 편백나무 등을 제치고 가장 높다고 한다. 항균과 면역 증진, 스트레스 조절 등 유익한 물질을 내는 대나무야말로 생활 속의 건강파트너이다.
필자는 대숲을 지날 때마다 특별한 감정에 젖곤 한다. 햇빛이 가늘게 줄기 사이로 스며들고 바람은 이파리를 흔들어 낮은 파도 같은 소리를 낸다. 그 순간 나는 마치 세상의 소음이 모두 멀리 사라지고 오직 바람과 대나무의 대화만이 남아 평화를 느낀다. 대숲은 고요하면서도 살아 있는 듯 끊임없이 숨 쉰다. 그 속에서 너무 많은 것을 움켜쥐려 하고 너무 많은 말로 자신을 채우려 한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대나무처럼 속을 비운다면 오히려 더 단단해지고 더 멀리 울려 퍼질 수 있음을 알게 된다.
대나무는 우리에게 많은 것을 가르쳐 준다. 곧게 자라되 뿌리를 깊이 내리는 자세, 속을 비움으로써 더 강해지는 이치, 바람 앞에서도 꺾이지 않는 유연함.
삶은 늘 예상치 못한 바람과 폭설을 몰고 오지만 대나무는 그 앞에서 하나의 본보기가 된다. 고개를 숙여 바람을 흘려보내고 눈을 견뎌낸 뒤 다시 일어서는 모습에서 우리는 회복의 지혜를 배운다.
오늘날 우리는 끊임없는 경쟁과 불안 속에 살아간다. 무엇이든 더 가지려 하고 더 채우려 하며 늘 앞서가야 한다는 압박에 시달린다. 그러나 대나무는 다른 길을 보여준다. 속을 비움으로써 울림을 얻고 흔들림 속에서 오히려 꺾이지 않는 강함을 보여준다. 그것은 비움과 유연함이야말로 불확실한 시대를 살아가는 데 필요한 덕목임을 말해 준다.
우리는 종종 스스로에게 묻는다. 지금 내 삶은 대나무처럼 곧고도 유연한가. 혹은 바람이 불 때마다 흔들리다 결국 부러지고 마는 갈대 같은가. 더 많이 움켜쥐려 할수록 내 마음은 무거워지고 작은 바람에도 쉽게 휘청거린다. 대나무는 나에게 답한다. 비워라, 그러면 더 단단해진다고. 뿌리를 깊이 내려라, 그러면 흔들려도 꺾이지 않는다고.
결국 대나무는 자연의 한 부분을 넘어 우리 삶의 스승이다. 푸른 잎처럼 꺼지지 않는 생명력, 곧은 줄기처럼 흔들림 없는 지조, 속이 빈 줄기처럼 겸허한 마음, 그리고 바람을 흘려보내는 유연함.
필자는 대나무 앞에 설 때마다 다짐한다. 나도 대나무처럼 살아가리라. 흔들리되 꺾이지 않고 비움으로써 울림을 얻으며 변화무쌍한 세상 속에서도 다시 하늘을 향해 곧게 일어서는 삶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