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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의 향기


김동정 / 수필가


진녹색이 연갈색으로 옮아가는 이즈음이다.
어디를 가나 가을의 정취가 물씬 풍기는 이맘때이지만 산과 들이 온통 불타는 듯 황홀한 농촌의 가을이야말로 가장 한국적인 모습이 아닐까?

수마가 할퀴고 지나간 농촌 들녘은 군데군데 패여 있지만 그래도 누렇게 익은 곡식을 바라보는 농부들의 표정은 기쁨이 가득하다. 땀 흘려 가꾼 곡식들을 찬찬히 살펴보고는 애써 위안을 찾는다.
지금은 가을의 한가운데다. 다사로운 햇살과 드높은 하늘, 그리고 두둥실 떠가는 뭉게구름이 동화(童話)처럼 아름답다. 언덕에 나부끼는 코스모스와 방죽에 널어놓은 산풀의 향기는 원초적인 그리움이 뭔지를 넌지시 일깨워주고.

정신없이 바빴던 일상에서 잠시 벗어나 가까운 교외로 나가 보라. 치잣빛으로 물들어가는 대지의 온화함이 온몸으로 밀려들 것이다. 알알이 여문 벼이삭, 멍석에 널어 말린 빨간 고추, 붉게 익은 감, 토담으로 흘러내리는 가을볕, 지붕 위에 주렁주렁 매달린 조롱박하며 모든 게 다사로운 가을이지 않은가. 
머잖아 찬바람이 돌면 모든 사물들은 조금씩 자신을 갈무리할 것이다. 인고의 계절을 준비하는 것이다. 봄에는 여자가 슬퍼지고, 가을에는 남자가 슬퍼진다고 했던가. 굳이 남자 여자를 구분하지 않더라도 가을에는 누구나 가슴앓이를 한다. 가을이 깊어질수록 고독과 쓸쓸함이 무슨 전염병처럼 쌓인다. 하늘은 더없이 청량하고 길가의 풀꽃들은 그 앙증맞은 자태를 한껏 뽐내건만 내 마음은 왜 이리 울적해지는 것일까.

가을 들판, 가을 바다, 가을 산이 주는 넉넉함 속에서 우리네 삶도 풍요로워지는 이맘때. 된서리가 내린다는 상강 무렵이면 마음은 벌써 겨울에 가 있다. 살결에 와 닿는 바람결의 감촉이 사뭇 다르고 산간지방에는 서리가 내려 초겨울로 접어든다. 

가을은 사색의 계절이다. 높고 푸른 하늘과 적당한 기온은 생활하기에 더없이 좋다. 가을이 주는 느낌은 고요와 우수, 그리고 풍성함이다. 시나브로 떨어지는 낙엽을 보면서 잠시 상념에 잠기는 것도, 깊은 밤 귀뚜라미 소리를 들으며 독서삼매경에 빠질 수 있는 것도 가을이 주는 선물이다. 마지막 한 잎까지 떨궈 버리고 긴 동면에 들어가야 하는 나뭇잎의 생애는 그 얼마나 거룩한가.
추적추적 내리는 가을비는 모두의 마음을 우수로 가득 채운다. 가을비 우산 속에 걸어가는 저 연인들의 표정에서 그런 기미를 읽는다. 깊은 밤 문 밖에서 들려오는 풀벌레소리며 누렇게 물들어가는 담쟁이덩굴이 가을이 깊었음을 알려준다.

10월의 어느 날, 거리를 걷다가 아이들의 함성을 들었다. 그 소리의 진원지는 초등학교 운동장. 그래, 가을 운동회가 벌어지고 있었다. 오색 풍선과 박수 소리와 만국기가 날리는 그 운동장을 우두커니 바라보았다. 문득 떠오르는 어린 시절의 삽화는 마음을 마냥 설레게 하고.

저물어가는 가을을 붙잡아두고 싶은 마음 간절하지만 계절의 순환은 어김없다. 가을은 너무 빨리 우리 곁을 떠나간다. 거리에 낙엽이 쌓이면 누구나 겨울을 예감한다. 스산한 바람에 이리저리 쓸리는 나뭇잎을 보면서 한없는 상념에 잠기기도 하고, 지나가는 연인들의 옷차림에서 문득 따뜻함을 찾곤 한다.
이즈음 산하는 온통 황금색이다. 그 현란한 산 빛깔을 보고 싶어 아침이면 산으로 향한다. 마을 사람들의 아늑한 쉼터이다. 대자연의 기운이 제대로 전달되는 곳, 매연과 먼지에 찌든 도시민들의 이상향(理想鄕)이다. 온갖 산(山) 목숨들이 노래하는 그곳에서 나는 시인이 된다. 산 들머리의 오솔길은 숲이 내뿜는 상쾌한 공기를 마시며 산책할 수 있는 최적의 장소이다.

연갈색으로 무성한 나무숲은 머잖아 제 모습을 잃어버릴 것이다. 발에 밟히는 낙엽의 감촉이 참 좋다. 샛노란 은행잎, 붉은 단풍잎, 황갈색의 활엽수들이 층을 이루고 있어 볼 때마다 묘한 감상을 불러일으킨다. 내가 사는 동네에 이런 산이 있다는 건 큰 축복이다. 유달리 일기(日氣)가 좋지 않았던 지난여름이었지만 단풍 색깔은 곱고 아름답다. 단풍으로 이름난 명산을 제쳐 두고라도 동네 앞산 뒷산에서 즐기는 단풍놀이의 재미가 그만이다.

나무들은 가을이면 단풍이 든다. 나무들의 이런 변화를 보면서 참 장하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그토록 왕성하던 몸의 일부를 털어내고 다음 생을 준비하는 나무의 일생. 사람들은 그런 나무를 보고 아름답다고 말하지만 나무에게는 그것이 곧 아픔이다.
가을이 무르익으면 그 무성하던 여름의 진녹색 숲은 바야흐로 ‘단풍바다’를 이룬다. 그래, 이 골짝 저 골짝이 물감을 풀어놓은 듯 화사하다. 이즈음 무릇 생명 있는 모든 것들은 그 왕성하던 활동을 안으로 곱접은 채 차분히 겨울을 준비한다. 나뭇잎이 하나 둘 떨어지는 것도 그 준비과정의 하나라고 하겠다. 가을은 우리에게 두 가지 의미로 다가온다. 그 하나는 결실과 수확이고, 다른 하나는 시듦과 조락(凋落)이다. 가을걷이의 풍성함 뒤에는 초목의 잎이 시드는 덧없음이 자리하는 것이다. 단풍이 성숙을 뜻한다면 낙엽은 허무의 표상이다. 노랗게 물든 은행잎을 바라보며 고즈넉한 감상에 빠지는 것도, 거리에 뒹구는 낙엽을 보며 쓸쓸함에 젖어드는 것도 다 가을이 주는 이미지와 관련이 있다.

굽이진 산길을 오르노라면 금방 숨이 가빠오지만 평평한 바위에 드러누워 하늘을 우러르면 그렇게 가뿐할 수 없다. 이런 멋에 산을 찾는다. 산길은 종종 나를 동화 속으로 안내한다. 재잘대는 새소리며 나무숲을 가로질러 온 산바람소리에 잠시 넋을 잃는다. 이런 자연이건만 그 고마움을 모르고 산다. 참으로 부끄러운 일이다. 이제부터라도 자연과 좀 더 친해지고 싶다. 그 향기를 온몸으로 받아들이고 싶다.    

산(山) 목숨들은 이토록 오묘한 섭리를 쉼 없이 보여준다. 저 가을 들판에 핀 한 송이 풀꽃은 또 얼마나 아름다운지. 코스모스, 물봉선, 채송화, 천일홍, 마타리, 억새풀…. 길가에 피어난 노란 산국, 분홍빛 구절초, 보랏빛 쑥부쟁이도 참 보기 좋다. 아무리 삭막한 사람살이라지만 함초롬히 얼굴을 내민 한 송이 풀꽃 앞에 서면 마음이 다사로워진다.

이 가을 스산한 마음을 뒤로하고 잠시나마 기분 전환을 해보자. 행복은 그냥 주어지는 게 아니다. 세상사가 번잡하고 사는 게 호락호락하지 않아도 우리 곁에는 자연이 있지 않은가. 내면을 살찌워야 모든 일에 자신감이 생기는 법이다. 자연과의 만남은 우리들의 메마른 정서를 부드럽게 감싸준다.
낙엽이 뿌리로 돌아가는 계절, 늘 그랬던 것처럼 즐겁게 부지런히 겸허하게 살자. 때가 되면 채우고 비울 줄 아는 저 자연의 섭리처럼. 이 짧은 가을, 우리는 결실의 기쁨을 함께 나누고 자연의 숨결을 온몸으로 받아들이는 가운데 좀 더 성숙된 ‘나’를 찾아야 하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