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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정사회와 칠불쇠퇴법

정성운
현대불교신문 편집부국장


요즘 논란이 되고 있는 공정사회론을 보며 지난해 서울신문에 난 용산참사와 관련한 한 칼럼이 떠올랐다. 한신대 국제관계학부 이해영 교수가 쓴 ‘이라크와 용산 그리고 국가란 무엇인가’라는 제목의 이 글은 공권력의 편파적인 행사를 비판하면서 국가란 무엇인가를 묻고 있다. 삶터에서 자꾸 밀려나 발 디딜 곳 없는 사람들에게 국가라는 존재가 과연 있는 것이냐는 절망감을 드러낸 가슴 아픈 글이다. 
이 교수는 국가를 정당한 물리력의 독점으로 정의한 막스 베버의 국가론을 인용하고, 두 가지 사건을 통해 국가권력이 스스로 국가권력을 부정하는 사례로 들어 비판한다. 하나는 부시 전 미국 대통령의 이라크전쟁이다.
“부시의 이라크전쟁에서 물리력의 독점이 깨지는 광경을 목격해야 했다. 각종 전쟁 전문기업들이 미 행정부의 특혜성 아웃소싱을 통해 ‘전쟁 용역’을 수주한 뒤 미군을 도와 이라크 민중에 대한 전쟁을 수행하였다. 이처럼 신자유주의 이윤논리는 전쟁의 사사화(私事化)를 통해 국가의 본질적 기능을 해체시키는 수준까지 전개되고 있다.”
용산 참사도 이라크전쟁과 다르지 않다고 분석한다.
“기본적으로 사인들 간의 이해 분쟁에 국가가 개입, 공권력을 함부로 행사해 6인의 목숨을 앗아갔다. 특히 이 과정에서 잘해야 분쟁 당사자 일방에 고용된 일개 사업자에 불과한 용역업체에 공권력의 사용을 아무런 법적 절차도 거치지 않은 채 양도, 위임하는 터무니없는 행태를 보였다.”
이 교수는 이어 ‘국가란 무엇인가?’라고 묻는다.
“이라크와 용산! 이윤 논리에 눈이 먼 사기업에 의해 제공된 ‘살인 용역’, 공권력이란 이름으로 자행된 무책임의 극치, 뒤를 이은 변명과 거짓말, 이 모든 것이 결국 공권력을 위태롭게 할 뿐이다. 사설업자를 동원해 자국민을 죽음으로 내몬 국가를 국가라 불러야 하나. 정녕 국가란 무엇인가?”
공정하다는 말은 ‘어느 쪽으로도 치우치지 않고 고르므로[公平] 비로소 올바르다[正]’는 뜻이다. 공정사회는 어느 사회를 막론하고 구현되어야 할 이상적인 사회의 모습을 나타낸다.
한 사회의 지향은 결핍에서 비롯된다. 결핍은 채우려는 욕구를 불러일으킨다. 그런데 결핍이 정치권력에 이르면 무한권력의 추구로 변질되며, 권력의 확장 과정에서는 비판그룹을 반국가 불온한 세력으로 매도하며 공권력을 동원해 무자비한 폭력을 가한다. 군사쿠데타로 집권한 전두환정권의 구호는 ‘정의사회 구현’이었다. 공공기관의 현관마다 걸려 있었다. 이 구호 아래 삼청교육대가 설치됐고, 군에서는 운동권학생들을 대상으로 ‘녹화사업’을 벌였다. 대학 내 집회 시위를 엄금했음은 물론, 3인 이상이 모여 책읽기 모임을 하려면 학교당국에 신고하도록 하는 학원안정법이라는 해괴한 입법이 추진되기도 했다. 언론엔 재갈을 물렸는데, 보도지침이란 문건에 따라 신문과 방송이 만들어졌다. 그들의 ‘정의사회’는 그런 식이었다. 정의롭지 못한 권력은 분칠해서라도 거짓을 가리려 했으며, 과감하게도 ‘정의’를 내세웠다.
이명박 대통령이 8.15 경축사에서 공정한 사회를 국정의 지표로 제시한 것은 우리 사회가 공정하지 못하다는 인식에서 나온 지향이다. 실제 우리 사회는 공정하지 못하다. 공정하지 못한 원인이 권력층에 있음에도 공정사회는 권력에 의해 채택된다.
문화일보가 여론조사 전문기관인 디오피니언에 의뢰해 공동으로 실시한 추석민심 여론조사 결과, ‘현재 우리 사회의 공정성 수준이 어느 정도라고 생각하는가’라는 질문에 ‘공정하다’(28.4%)는 견해보다 ‘공정하지 못하다’(69.6%)는 부정적 평가가 압도적으로 높게 나타났다. ‘공정한 사회 실현을 위해 가장 중요한 일은 무엇이라고 생각하는가’는 선결요소를 묻는 질문에 응답자는 ‘권력층의 실천의지와 솔선수범’(33.1%), ‘엄정하고 투명한 법집행’(28.1%), ‘약자에 대한 배려’(15.8%), ‘불공정을 묵인하는 국민의식 개선’(10.9%), ‘공정한 법·제도 마련’(10.1%) 등의 순서로 꼽았다.[문화일보, 2010. 9. 17, 1면]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사회는 권력층이 공정하지 못하며, 법집행은 80년대 유행했던 ‘유전무죄’를 넘어서지 못했으며, 약자는 더욱 나락으로 떨어지고 있고, 국민들은 체념하고 있는 가운데 공정사회를 위한 법과 제도조차 미비하다는 것으로 고쳐 읽어도 틀리지 않은 상황이다.
석가모니 부처님은 정치권력의 필요성을 인정하면서도 수행자들에게 정치권력을 멀리 하라고 가르쳤다. 그렇다고 정치 무관심을 긍정하지도 않았다.
“붓다는 정치권력이란 주민의 합의에 의해서 질서유지의 필요성 때문에 존재하는 것인데, 현실적으로 권력자의 욕심으로 인해서 폭력과 강압에 의해 운영되는 현실정치의 한계를 알기 때문에 수행자들이 권력과 멀리 할 것을 권고하였던 것이다.”[정천구, 붓다와 현대정치, 75쪽]
칠불쇠퇴법은 바람직한 승가의 유지를 위한 가르침이다. 그런데 이 법이 설해진 연유를 보면 꼭 승가에만 적용될 것이 아니라 한 나라의 운영원리로서 제시된 것임을 알 수 있다. 붓다가 살던 시대는 국가 간의 전쟁이 빈번했던 혼란의 시기였다. 마가다국의 국왕 아자따삿뚜는 밧지국을 공격하기에 앞서 붓다에게 대신을 보내 ‘밧지국을 공격해 이길 수 있는가’를 물었다. 붓다는 대답하지 않고 시자인 아난다에게 ‘밧지국 사람들이 자주 모여 논의하고 화합하느냐’ 등 일곱 가지를 물었고, 아난다는 ‘그렇다’고 답했다. 붓다는 제자들을 모아놓고 ‘일곱 가지 가운데 하나라도 제대로 실행한다면 밧지국은 망하지 않는다’고 설했다. 마가다국은 밧지국을 공격하지 않았다.
공정사회를 둘러싼 논란이 한창인 이 때에 붓다가 아난다에게 한 질문 [칠불쇠퇴법]을 새겨본다.
밧지국 사람들은 자주 모임을 갖고 올바른 정사(政事)를 논의하는가? 군신이 서로 화합하고 윗사람과 아랫사람이 서로 존경하는가? 법을 받들고 금기를 지키며 예의에 어그러짐이 없는가? 부모에게 효도하고 스승과 어른을 공경하는가? 종묘를 받들고 조상을 경배하는가? 여성들이 정결하고 웃고 놀 때도 사특한 것이 없는가? 사문과 계를 지키는 자를 존중하고 받들어 부양하는데 게으름이 없는가?[위 정천구, 77쪽에서 재인용] 
칠불쇠퇴법과 함께 부처님은 <대승본생심지관경>에서 정치지도자의 덕목에 대해서도 설했다. 지혜의 눈으로 세간을 비추어보며, 복과 지혜로 나라를 장엄하며, 국민에게 큰 안락을 제공하며, 원한을 쉬게 하며, 두려움을 없애주며, 어진 이를 모아 나라 일을 보도록 하며, 백성이 왕에게 의지케 하며, 천왕법으로 세간을 유지하며, 선악의 법이 왕에게 속하며, 국민이 왕을 섬기도록 하는 것이라고 했다.
부처님이 제시하신 칠불쇠퇴법과 정치지도자의 덕목을 새겨보는 까닭은, 장관의 딸이 부당한 방법으로 특별채용된 것이 여론의 뭇매를 맞자 물러나는 것으로 공정사회는 이뤄지지 않음을 강조하려는 것이며, 또한 공정사회가 한 정권의 구호로 전락되지 않기를 바라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