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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 관용의 가치

최윤필
한국일보 기자


지구촌 문명사회에서 한국처럼 다종교가 우애하는 문화를 누리고 있는 나라도 드물다고 합니다. 서로 다른 종교인들끼리 서로의 신앙생활에 대해 대화하고, 유신론자와 무신론자도 각자의 종교관에 대해 큰 부담 없이 토론합니다. 평행선의 한 선분 위에 완강히 버텨 서서 제 선분의 아득한 끄트머리만 응시한 채 제 말만 하는 경우도 있고 그러다 언성이 높아지는 예도 있지만, 대개는 그러다가 맙니다. 이것은 우리 사회 평균적 시민의 영혼이, 태어나면서부터 전일적 종교체계에 편입된 사회의 시민들과 달리 종교적 율법과 가치를 상대적으로 덜 중시하는 까닭일 수도 있고, 종교적 관용의 가치를 자신이 신앙하는 종교 율법보다 무겁게 여기기 때문일 수도 있고, 아예 답이 없는 일이니 애당초 거리 두기를 하는 탓인지도 모릅니다. 원인이 뭐든 다양한 종교가-유신론자와 무신론자까지도- 우애하는 문화는 소중하고 다행스럽습니다.


세계적 물리학자 스티븐 호킹의 새 책 <위대한 설계(The Grand Design)>이 기독교 사회를 뜨겁게 달구고 있다고 합니다. 그는 책에서 우주는 신의 작품이 아니라 스스로 자신을 창조했다고 주장했다고 합니다. 즉 중력과 양자이론과 같은 자연법칙에 의해 우주가 ‘자발적으로 창조(spontaneous creation)’되었다는 것입니다. 그가 말하는 우주는 물론 인간을 비롯한 지구의 모든 생명들도 포괄하는 우주여서, 창조론의 우주에 정면으로, 전면적으로 맞섭니다. 그의 논리에 따르자면 아담과 하와의 구약성서는 성서가 아니라 그리스·로마가 낳은 하고많은 고전 신화의 자리로 내려앉아야 합니다. 
당연히 창조론자를 중심으로 한 기독교 사회는 불편함과 불쾌감을 감추지 않고 있습니다. 영국 왕립연구소장을 지낸 수전 그린필드 옥스퍼드 링컨대 교수는 BBC방송과의 인터뷰에서 “과학이 모든 해답을 갖고 있는 것처럼 행동하는 것은 탈레반과 같은 행동”이라며 “과학이 일부 학자들의 오만에 의해 종종 시달린다”고 맹비난하기도 했습니다. 
대표적 무신론자인 진화생물학자 리처드 도킨스가 <만들어진 신>을 출간했을 당시에도 지금과 흡사한 논란이 있었지만, 호킹의 이번 저서는 논쟁을 한 걸음 더 깊숙이 끌어다 놓았습니다.
호킹은 적어도 대중적으로는 현대 우주 물리학 분야, 나아가 기초과학 진영을 상징하는 로마 바티칸의 교황과 같은 존재로 인식되는 존재입니다. 그런 그가 “과학적 설명은 완전하며 신학은 불필요하다”고 선언한 것입니다. 이것은 종교와 과학의 화해 가능성을 근원적으로 부인하고 궁극적으로 차단하는 선언입니다. 
유·무신론의 대립의 뿌리는 아주 깊습니다. 100년 전 사람인 찰스 다윈은 그의 <종의 기원>에서 동시대인들이 자연에 대해 믿고 있는 모든 것에 의문을 제기하며 에덴동산을 완전히 배제한 기원 이론을 제시한 바 있습니다. 그는 ‘천상의 시계공’이 지상에서 살아갈 생물들을 만들었다는 동시대인의 상식을 폐기하고, 자연이 얼마나 잔인하며 실수투성이인지를 보여주었습니다. 르네상스시대의 갈릴레오 갈릴레이와 더 멀리 코페르니쿠스의 이야기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유럽 사회, 나아가 서구 사회에 종교 관용의 가치를 뼈저리게 각인시킨 사건이 독일 30년전쟁(1618~1648)입니다. 종교 선택의 자유를 전면에 내세워 유럽의 거의 모든 나라가 30년 동안 치른 전쟁입니다. 물론 종교 갈등이 세속 정치권력의 이해와 맞물려 번진 피의 역사는 훨씬 광범위하고 보편적입니다. 멀리 십자군전쟁도 있고 가까이는 서구사회와 이슬람국가들 사이의 전쟁 예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 전쟁들은 유럽인의 시각에서는 이교도와의 전쟁, 사악한 무리와의 전쟁이었습니다. 요컨대 성전이었습니다. 하지만 프로테스탄트와 정통가톨릭이 맞붙은 독일 30년전쟁은 그들과 같은 피부색을 지니고 같은 신을 섬겨온 이웃들과 종교를 두고 벌인 전쟁입니다.
전쟁의 도화선은 당시 독일(신성로마제국이라는 이름으로 불리던 300여 개의 제후국 연방) 뵈멘(보헤미아)의 수도 프라하(현 체코 수도)에서 지펴집니다. 루터파 신교가 우세하던 이 곳에 예수회 교육을 받은 완고한 가톨릭주의자 페르디난트 2세가 왕이 되면서 신교를 탄압합니다(1617년). 이에 신교파 귀족 대표들이 탄압의 중지를 요구하며 시민군을 조직해 국왕의 군대에 맞서고, 주변 제후국과 영국 덴마크 스웨덴 스페인 프랑스 등 여러 유럽 국가들이 신교연합과 구교동맹으로 가담하면서 국제전 양상으로 번지는 것입니다. 물론 그 배후에는 각 제후·국왕들의 개종, 결혼, 상속 등을 둘러싼 복잡다기한 정치·경제적 이해가 얽혀 있었습니다. 승패 없이 끝난 이 전쟁으로 유럽은 엄청난 참상을 경험합니다. 당시 1,600만 명에 달하던 독일 인구 가운데 1,000만 명이 이 전쟁으로 희생됩니다. 위대한 천문학자 케플러가 굶어 죽은 것도 이 전쟁 와중이었습니다.
그 결과 유럽 사회는 신의 이름을 앞세워 포교하는 이들이 어쩌면 신의 진정한 대리인이 아닐지도 모른다는 각성과 함께 종교적 관용의 가치를 뼈저리게 깨닫게 됩니다. 그리고 이 같은 사변(사태의 변화)은 18세기에 만개하는 유럽 근대 계몽주의의 중요한 정신적 자산이 됩니다. 유럽 배낭여행을 다녀오신 분이라면 누구나 알듯이 유럽 어느 나라를 가더라도 신교든 구교든 길거리에서 포교활동을 벌이는 예는 없습니다. 자신이 신봉하는 종교적 가치를 공격적으로 드러내는 일이 어떻게 귀결된다는 것을 그들은 역사를 통해 배운 것입니다.


며칠 전 직장에서 의학담당 기자와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던 중 누가 그에게 이렇게 물었습니다.
“요즘 들어 오후가 되면 뒷목이 뻐근하고 묵직해지는 게 피가 제대로 안 흐른다는 느낌이 들어. DHA인가 뭔가, 하는 생선기름 영양보충제 같은 거 먹어볼까 하는데 어떨까?”
그런데 그의 대답이 뜻밖이었습니다.
“쓸 데 없는 짓이야. 금강경 한 줄 읽는 게 나아.”
그는 매주 일요일마다 교회에 가지 않으면 큰 일 나는 줄 아는 독실한 기독교인입니다. 그런데 금강경이라니! 아시다시피 금강경은 대승불교 입문서요, 대한불교 조계종의 중심경전입니다. 그는 덧붙입니다.
“항복기심(降伏其心)! 복덕을 탐하지 않는 마음! 그게 안 되니까 뒷목이 뻐근한 거야. 스트레스를 덜 받는 게 90%! DHA는 10%! 한 마디로 하루 10분이라도 차분히 마음 가라앉히고 불경 한 줄 읽는 게 보충제 한 통 먹는 것보다 낫다는 거지.”
그는 빙긋이 웃으며 “내 경험이야”라고 덧붙였습니다.
그의 말에, 곁에 있던 또 다른 누군가가 “불교 경전을 건강보충제로 활용하라는 얘기군.”하며 살짝 비트는 농담을 한 것도 같습니다.
하지만 저는 그들과의 대화에서 신선한 관용의 기운을 본 듯했습니다. 절 밥이 맛있고 향내가 좋아서 절에 간다는 이도 있고, 고즈넉한 분위기를 좇아 소요하듯 경내를 거닌다는 이들도 있습니다. 기도문 읊는 소리가 좋아 성당 예배를 본다는 이들도 있고, 동아리 활동을 위해 교회에 간다는 이도 있습니다. 그럼으로써 낯선 종교와 조금씩 가까워지기도 합니다. 그 가치는 신의 존재를 부정하는 천체물리학의 정교한 수학적 공식도 규명하지 못하는 영역입니다.


규모와 성격과 양상은 다르지만 우리에게도 종교가 얽혀 있는 피의 역사는 있습니다. 조선 중기 정감록을 둘러싼 국지적 파란이 있었고, 18세기 서학(천주학)을 둘러싼 박해가 있었고, 19세기말 동학농민전쟁이 있었습니다.
우리는 그 피의 역사로부터 무엇을 배우고 얻었을까요. 정감록은 호사가들의 옛이야기 수준으로 언급되는 것 같고, 서학 파동은 천주교 바깥에서는 새로 전래된 종교의 성장통이나 통과의례 정도로 여겨지고 있고, 동학은 종교적 가치보다는 정치적 맥락(독립운동)에서 주로 연구되고 인식되는 것 같습니다.
지금도 명동 한복판이나 신도시의 어느 건널목 앞에서는 확성기를 들고, 혹은 작은 사탕봉지와 함께 부흥대회 전단지를 돌리면서 공격적으로 포교하는 이들이 적지 않습니다.
역사를 공부하고 연구하는 이라면 누구나 하는 말이 있습니다. 인간이 역사를 끌고 가지만, 그 역사를 통해 배우려 하지는 않는다는 것이지요. 그렇기 때문에 역사는 반복된다고 합니다. 우리에게도 종교 관용의 가치에 초점을 맞춘 통시적 한국 종교연구가 있어야 할 것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