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리아스
조 현
한겨레신문 종교전문기자
지금까지 인류 역사에서 가장 큰 영향을 끼친 책들은 무엇일까. 불경, 성경, 사서삼경 등을 꼽을 수 있을 것이다. 불교, 기독교, 유교의 경전들보다 훨씬 더 일찍 씌어진 <일리아스>도 이들 경전 못지않게 큰 영향을 끼친 책이다. 아니 서구 사상의 형성에 그 어떤 책보다 주춧돌이 된 책으로 평가해도 무방하다.
<일리아스>는 기원전 800년쯤 그리스의 호머에 의해서 씌어졌다. 호머는 단테와 셰익스피어, 괴테 등의 새까만 후배와 함께 4대 시성으로 불린다. 우리나라에도 개봉돼 큰 인기를 얻은 <트로이>는 <일리아스>를 영화화한 것이다. <일리아스>는 9년간에 걸쳐 그리스연합군과 트로이간에 벌어진 ‘트로이전쟁’ 막판 50일간의 기록이다.
<일리아스>는 나관중(1330? ~ 1400)의 <삼국지연의>보다 무려 2천년도 더 전인 기원전 800년쯤에 씌어졌다. 아킬레스나 헥토르의 결투 묘사는 관우와 조자량의 전투 못지않게 역동적이며 생생하다.
그렇지만 <일리아스>에서 인간의 역할이란 아주 미약하다. 인간들이 아무리 노력을 해도, 신들이 나타나서 전세를 뒤집어버리곤 한다. 올림포스산 위에서 내려다보면서 그들이 두는 장기에, 인간이란 ‘졸卒’이 꼭두각시처럼 움직여 영웅이 되기도 하고, 힘없이 죽어 나자빠지기도 한다. 영화 <트로이>는 이런 훼방꾼 신들을 스크린 밖으로 내보냈기에 흥미진진했던 것이다.
지난 4월말 지금은 터키 땅인 에개해변 트로이성을 갔다. 그곳에서 가장 먼저 눈에 띄는 것은 ‘트로이의 목마’였다. 트로이의 영웅 헥토르가 그리스의 전사 아킬레스의 손에 죽고서도 결코 함락되지 않던 트로이 철옹성을 무너뜨린 속임수 미끼다. 호메로스의 <일리아스>는 헥토르의 장례식으로 막을 내리고, 호메로스로부터 영향을 받은 로마의 시인 베르길리우스가 지은 <아이네이스>에 트로이 목마에 대한 이야기가 나온다.
‘트로이의 목마’는 모사꾼 오디세우스가 그리스군이 모두 퇴각한 것처럼 꾸미고, 특공대원들을 숨겨 트로이성 안에 잠입시키기 위해 만들었다고 전한다. 목마 속에 오디세우스와 아킬레스 등이 숨어있다는 걸 모르는 트로이에선 대형 목마를 ‘신의 선물’이라며 트로이성으로 끌고 들어온 뒤, 진탕 술을 마시며 축제의 밤을 즐기다가 한밤중에 도륙 당했다. 관광객들은 이 흉물이 마치 디즈니랜드의 목마나 되는 양 반기고, 앞다투어 안으로 들어가 밖을 내다보며 손을 흔든다.
목마 뒤로 트로이의 옛 유적지인 히살리크 언덕이 있는 곳은 옛 지명이 ‘일리온’이다. <일리아스>는 ‘일리온에 관한 시’라는 뜻이다.
언덕 위 돌성을 돌아가 풀숲을 지나니 간간히 돌무더기들과 돌층계들이 모습을 나타냈다. 둔덕 위에서 보니, 6Km 떨어진 에게해 해안까지 넓은 벌판이 펼쳐져 있다.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것은 영화   <트로이>에서 미처 본선이 해안에 당도하기 전에, 가장 먼저 해안에 상륙하는 아킬레스와 그의 전사들이었다.
아시아 정복에 나서면서 늘 <일리아스>를 옆에 끼고 잠들만큼 전사 아킬레스를 존경하고 사랑했던 알렉산드로스도 이곳에 들러 제를 올린 뒤 전장으로 나갔다.
아킬레스는 사자처럼 날랬다. 그는 영화 속에서 빗발치는 화살을 뚫고 어느새 아폴론신전에 이르렀다. 그는 신전에서 사제까지 가차 없이 베어버렸다. 그의 심복은 그가 신전을 모욕한 것을 두려워하며 “아폴론신을 모독하면 진노를 살 것”이라고 말했다. 그 때 아킬레스는 에게해의 그리스연합군 쪽으로 활을 겨누고 있는 황금 아폴론상의 목도 칼로 두 동강 내버린다. 인간들을 돕다가 제우스로부터 처절한 보복을 받은 프로메테우스나, 신들로부터 이루 말로 다할 수 없는 부당한 억압과 살육을 당한 인간의 한을 토해내듯.
하지만 서사시는 영화와는 딴판이다. 훗날 전쟁이 그리스군의 승리로 끝났음에도 트로이 여신의 신전에서 여신상을 손상시킨 전우 로크리아의 아이아스를 돌로 내려쳐 죽일 만큼 신의 보복이 두려워 덜덜 떤 그들이었으니, 신상의 목을 단칼에 날린 영화 속 아킬레스의 모습은 나가도 너무 나간 게 아닐 수 없다.
아킬레스는 최고의 전사이기도 하지만 마마보이다. 이 전쟁도 애초 그의 부모가 결혼식에 에리스 여신을 초대하지 않은 것에서 시작됐는데, 오지랖 넓은 아킬레스의 어머니 테티스 여신이 전쟁을 좌지우지해 양쪽에 엄청난 살생을 야기한다. 아폴론신전에서 보쌈해 온 예쁜 여사제를 그리스연합군 총사령관 아가멤논왕이 뺏어가 버렸다고 외아들 아킬레스가 칭얼대자, 그녀는 처녀시절 자신을 연모했던 제우스에게 달려가선 트로이군이 그리스군을 도륙하도록 부탁한다. 아가멤논이 아킬레스의 필요성을 절절히 느끼도록 해달라는 것이다. 아들의 체면을 위해 아군을 도륙해달라고 부탁할 만큼 인간의 목숨은 개미나 다름없이 여기는 신이다. 제우스는 테티스의 청을 받아들여 헥토르를 앞세운 트로이군이 아가멤논의 군사들을 마음껏 도륙하도록 해준다. 트로이의 파리스 왕자가 자신들을 제치고 아프로디테를 ‘미의 여왕’으로 뽑은 것에 한을 품어 트로이를 박살내야 한다는 헤라와 아테네의 간청을 묵살한 채.
궁지에 몰린 아가멤논이 아킬레스에게 싹싹 빌어, 테티스가 목적하는 바를 달성하자 제우스는 헤라와 아테네의 요청대로 이번엔 그리스군 쪽에 트로이군 살해권을 준다.
전쟁에선 테티스 뿐 아니라 헤라와 아테나, 포세이돈이 그리스연합군 편으로, 아폴로와 전쟁의 신 아레스, 미의 여신 아프로디테가 트로이군 편으로 나뉘어 북치고 장구 친다. 인간들은 왜 갑자기 전세가 불리해지고, 힘이 쏙 빠져 상대의 칼과 창에 맥없이 죽어야 하는지도 모른 채 그저 죽어갈 뿐이다.
트로이의 옛 유적지 위에선 사라져버린 목 위에 솟은 핏빛 넋인 듯 꽃들이 애달프게 서 있었다. 19세기에 이 유적지를 발굴했을 때 성채엔 매장되지 않은 유골들이 여기저기 흩어져 있었다고 한다. 전시에 남자는 남김없이 죽였고, 여자는 노예로 삼았고, 아이들은 불구덩이 속으로 던져졌다.
누가 승자인가. 오직 명예와 복수를 위해 싸우는 아킬레스도 죽었고, 국가와 가족을 위해 싸운 헥토르도 죽었다. 에게해의 패권을 장악하기 위한 항해에 앞서 포세이돈을 달래기 위해 자기 딸을 바다에 던져버리고 가 트로이성을 멸망시킨 아가멤논도 결국 고국으로 돌아가자마자 딸을 죽인데 앙심을 품은 아내에 의해 살해됐다.
그리스인들이 해안에 목마를 놔둔 채 자기들은 배를 타고 모두 고국으로 돌아간 것처럼 꾸몄을 때, 사제 라오콘은 목마가 성 안에 들어오지 못하도록 불태워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는 목마에 투창을 던져 목마 안이 비어있음을 증명해 보이기까지 했다. 그리스연합군이 무사귀환을 빌기 위해 포세이돈에게 바치는 제물이 아니라, 안을 비워 적군을 숨겨놓은 ‘공작선’일 가능성이 있음을 증명해보인 것이었다.
그런데도 트로이인들은 그 목마를 신주단지처럼 곱게 성 안에 모셔왔다. 그래서 그날 밤 멸망한 것이다.
신이 자기의 편이라거나 악을 심판할 거라고 자기들 좋을 대로 해석한 결과는 이토록 참혹했다.
적들의 흉계에 속아서는 안 된다고 말했다가 뱀에 감겨 고통 받는 양심가 라오콘은 외친다. ‘신의 축복’이니 ‘신의 저주’란 말에 현혹돼 자신의 삶을 송두리째 노예상태로 전락시키고 있지 않느냐고.
그러나 지금도 트로이성과 인근 차낙칼레 항구의 명물 ‘트로이의 목마’엔 수많은 이들이 찾아든다. 3천 년 간의 경고를 무시한 채 여전히 ‘신의 선물’일지 모른다면서.
<일리아스>는 결국 모든 것은 신의 뜻에 달려 있다는 도그마를 퍼트린다. 하지만 붓다는 평생 어떤 죄를 저질렀더라도 강가강에 몸을 담그면 모든 죄가 소멸된다는 사람들에게 말했다.
“강가강에 몸을 담가 천국에 간다면, 강가강의 물고기들이 가장 먼저 천국에 가겠구나.”
또 과거의 죄업은 돌과 같아서 무거운 돌을 강가강에 빠뜨려놓고, “돌아 떠올라라.”고 아무리 빌어도 돌이 떠오를 수 없다며, 기도로 천국에 가는 것이 아니라 삶의 결과에 따라 다음 생이 결정된다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