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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편의 텃밭 가꾸기

이지숙
수필가·문화센터 강사


과학자인 남편은 젊은 시절  30~40대에는 가족들과 대화할 정신적 여유가 전혀 없을 정도로 매우 바쁘게 지냈다. 매일 연구에 몰두한 나머지 귀가시간이 12시가 넘지 않을 때가 거의 없을 정도였다. 그러다 보니 어느 날 저녁 일찍 귀가한 남편을 보고 강도가 들어온 줄 착각하여 소리를 지르며 도망친 웃지못할 해프닝이 발생한 적도 있었다.
그렇게 주위를 돌아볼 시간 없이 바쁘게 지내던 남편이 지금은 연구소 텃밭에서 채소를 가꿔 상추, 가지, 고추 등 한 웅큼 수확한 채소를 미소와 함께 가져오는 모습을 보노라면, 웬지 내 마음이 짠해지는 것을 느낀다.
연구가 인생의 전부인양 앞만 보고 달려온 남편이 “나이가 들수록 변치 않고 제자리에 있는 것은 가족뿐인 것 같다”고 말하는 모습에서 알 수 없는 허탈감과 아쉬움이 뭉게뭉게 피어오른다. 자연은 결코 배신하지 않는다. 뿌린 만큼 거둘 수 있으므로….
그러나 인간세계는 어디 그런가! 콩을 심었는데 엉뚱한 팥을 수확할 수도 있고, 전력을 다해 농사를 지었는데 말라 비틀어져 수확할 수 없는 인간관계도 있다. 때로는 상식보다는 비상식이 허용되고, 힘 자체가 도덕이요 상식일 수도 있는 세상이라는 것을 종종 느끼는 요즘이다.
“홀연히 날아와 홀연히 피고 홀연히 떠나간 노란 민들레 그것이 인생人生”이라고 했던가! 남편이 연구에 너무 몰두하다 오랜만에 만난 자식을 보고 “너 몇 학년이지? 못 보는 사이 많이 컸네”라고 말하여 충격을 받았다는 어느 과학자 부인이 생각났다. 너무 바빴던 지난 시간과 수확한 채소를 행복한 마음으로 소중하게 안고 들어오는 남편의 현재 모습이 오버랩 되어 쓸쓸함이 밀물처럼 밀려왔다.
우리는 살면서 경험하기 전에는 전혀 실감하지 못하는 경우가 있다. 나이가 든다는 것은 점점 외로움의 터널로 진입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외로움을 친구삼아 살아야 하는…. 남편은 이제야 그것을 알고 있는 듯 보인다.
연구만이 남편이 살아가는 유일한 이유로 비춰져 보는 이로 하여금 안타깝게 느껴졌는데, 이제는 실감을 하는가 보다. 나이가 들수록 자신에게 가장 소중한 것이 무엇인지….
전쟁이 끝난 폐허에서 희망을 노래하듯 새로운 꿈을 꾸고 있는 남편의 모습이 예전보다 여유 있고 평화로워 보임은 나만의 착각일까? 타인이 우리에게 준 의미가 아니라, 우리가 만든 의미로 흔적을 남기는 것이 인생이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