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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과나무

홍성범
숲해설가


수확의 계절 가을이다.
시장에는 온갖 과일이 사람들의 지갑을 열게 한다. 그중 우리 한국인에게 전통적으로 사랑받아온 과일의 으뜸은 사과가 아닐까.
사과나무는 사계절 모두 우리에게 선물이다.
봄이면 사과나무는 가장 먼저 꽃소식을 전한다.
연둣빛 새순이 돋고 가지마다 작은 꽃봉오리가 다투어 터진다. 하얀 꽃잎에 분홍빛이 살짝 감도는 그 모습은 수줍은 미소와도 같다. 바람이 불면 꽃잎이 흩날리며 눈송이처럼 내려앉는다. 그 풍경은 짧지만 강렬해 한 해를 알리는 축제와 같다. 매화, 자두, 살구, 벚나무 등 예쁜 꽃을 뽐내는 장미과 형제들과 온 산야에 봄을 알린다.
여름이 오면 사과나무는 푸른 잎을 무성하게 틔운다.
가지는 햇살을 막아 그늘을 드리우고 새들은 그 사이에 보금자리를 튼다. 바람에 잎사귀가 흔들리는 소리는 마음의 속도를 늦추고 잠시 쉼을 허락한다. 여름의 사과나무는 작은 숲이며 생명의 울타리다.
가을의 사과나무는 그 어떤 나무보다도 풍요롭다.
가지마다 햇볕을 머금은 열매가 주렁주렁 달려 붉게 빛난다. 농부의 손길과 아이들의 웃음소리가 밭을 채운다. 수확의 계절, 한 알의 사과를 베어 물면 새콤달콤한 맛과 함께 그간의 기다림을 보상받기 충분하다.
겨울의 사과나무는 앙상하지만 고고하다.
잎도 열매도 모두 떠나보내고 고요히 서 있으나 그 침묵 속에는 이미 다음 봄을 준비하는 힘이 숨어 있다. 눈 덮인 가지 위로 햇살이 스며들면 나무는 다시 꽃을 피울 약속을 한다. 나무는 겨울눈에 다음해를 모두 담고 있다.
이렇듯 사과나무는 모든 계절 친숙하고 정겹다. 그래서일까 동서고금 사과나무는 단순한 과수가 아닌 특별한 나무로 다가왔다.
인류의 오래된 일화에 특별한 상징으로 등장하는 사과나무. 성경의 ‘선악과’는 인간의 운명을 바꾸었고, 그리스 신화의 ‘황금사과’는 트로이 전쟁을 불러왔다. 뉴턴이 사과는 과학사의 상징처럼 남았다. 진실여부를 떠나 한 알의 사과가 인간의 지혜와 깨달음을 상징하게 된 것이다.
사과는 중앙아시아가 원산지이다. 전한시대 장건이 서역을 정벌하면서 중국에 전파된 것으로 보고 있다. 우리나라에는 고려시대 유입된 것으로 보인다. 그러다가 1900년 전후 미국 선교사들이 대구와 평양에 처음으로 서양 사과 묘목을 심으면서 과수로서 우리 땅에 뿌리내리기 시작했다. 이후 다양한 품종과 재배법이 도입되었다. 당시 사과를 재배하기 적합한 기후인 경북과 충북 일대가 주산지가 되었다. 그중에서도 대구는 사과의 고장으로 한때 ‘대구 사과’라는 이름은 품질 좋은 과일의 대명사였다. 대구에는 사과를 많이 먹어 미인이 많다고도 할 정도였다.
한국전쟁 직후 황폐해진 땅에 농민들은 특용작물로 본격적으로 사과나무를 심었다. 그리고 몇 해 뒤 가지마다 붉게 익은 열매가 매달린 풍경은 폐허 속에서도 다시 살아날 수 있다는 희망의 증거이기에 충분했다. 당시 사과밭은 회복과 부활의 상징이었다. 70년대 제주 감귤밭처럼.
사과 품종 중 붉은색인 ‘홍옥’은 신맛과 단맛이 적당해 아이들과 여자들의 사랑을 많이 받았다. 껍질이 푸른색인 ‘인도’는 육질이 단단한 반면 수분이 적어 눈이 내리는 겨울에 먹으면 달콤한 밤을 먹는 듯했다. 황금색 ‘골덴’ 품종은 향기가 짙고 육질이 연해 아이스크림을 먹는 느낌이다. ‘국광’은 혹옥에 비해 알이 작다. 단맛과 신맛이 적당하나 향기가 적다. 12월에 수확해 만생종으로 인기를 얻었다. 그 밖에 스타킹, 이와이 등 품종도 다양했다. 그러다가 언제부터인가 이런 품종들은 접하기가 어렵게 되었고 사과하면 부사가 대세가 되었다. 여러 품종들의 장점을 모아 개량한 것으로 여타의 품종들의 자리를 빼앗아버렸다. 점점 발달하는 현대의 육종기술은 더욱 맛있고 크기도 큰 사과를 생산하고 있는데 가끔은 지금은 접하기 어려운 옛날의 품종들을 그리워하며 소품종 대량생산이 아쉽기만 하다.
한국인의 생활 속에 사과는 정겹다.
손님을 맞을 때 막 깎아낸 사과를 내놓는 일은 지금의 커피 대접보다 일상이었다. 가족이 둘러앉아 사과를 한 조각씩 나누어 먹는 풍경은 그 자체로 따뜻한 정이었다. 운동회나 소풍에 챙겨 가던 사과, 싸늘한 가을 공기와 함께 베어 물던 사과의 맛은 세대마다 공유하는 기억이다.
그러나 지금 사과나무는 새로운 시련을 맞고 있다.
사과는 겨울의 추위를 견뎌야 봄에 꽃을 피운다. 하지만 지구온난화로 인해 겨울이 짧아지고 따뜻해지면서 남부지역에서는 꽃이 제때 피지 않거나 열매의 크기와 맛이 떨어지기도 한다.
농촌진흥청 자료에 따르면, 30년 전 전체 사과 생산량의 절반 이상을 차지하던 경북 지역의 비중은 줄어들고 있다. 그 대신 강원도 철원, 화천, 태백 같은 북부 지역이 새로운 재배지로 떠오르고 있다. 불과 한 세대 전만 해도 상상하기 힘든 변화다.
지난주 숲해설가 선후배들과 강원도 정선군 덕산기계곡에 나무공부를 갔다가 새로 조성된 현지 사과농장을 보고 반갑기도 했지만 씁쓸한 마음을 지울 수 없었다.
병해충 문제도 심각하다.
그동안 겨울에는 죽던 해충들이 고온에 계속 살아남아 봄부터 나무를 괴롭힌다, 농민들은 더 많은 비용과 노력을 들여야 한다. 과학자와 농민들은 포기하지 않고 더위와 병충해에 강한 품종을 개발하고 스마트팜 기술로 온도와 습도를 조절하며 새로운 길을 찾는다. 어떤 농가는 드론을 띄워 해충을 관리하고 또 다른 농가는 차광막을 설치해 뜨거운 햇살을 막기도 한다.
하지만 수확량은 줄고 일손은 더 필요한 심각한 상황이 계속되고 있다. 가끔씩 뉴스에 등장하는 ‘금값사과’는 언제든지 재현될 수 있다. 지금 사과밭은 기후변화의 전쟁터다.
사과나무 앞에 서서 다시 겸손을 생각한다.
사과나무는 꽃을 피우기 위해 겨울을 묵묵히 견딘다. 많은 나무들이 그런 것처럼 열매를 맺기 위해 계절을 기다리며 다시 시작한다.
가을의 사과밭에 서면, 붉게 익은 열매들 사이로 햇살이 흘러든다. 그것은 단순한 빛이 아니라, 기다림의 결실이자 자연의 선물, 그리고 인간과 함께 걸어온 세월의 증거다.
나는 바란다. 앞으로도 우리의 아이들이 가을 사과밭에서 이 풍경을 보기를.
추석을 앞두고 햇살에 빛나는 사과를 보며 계절의 기쁨을 온전히 느끼기를.
어떤 가수는 열창했다.
방송에서 그리고 거리마다 스피커를 통해 자주 들려진 그의 노래에 우리는 공감했다.
“종로에는 사과나무를 심어보자. 그 길에서 꿈을 꾸며 걸어가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