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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순한 생명으로 돌아갈 시간 앞에 서다

-용문사 찻집 <솔내음 다래향>에서-


이서연
시인


가을, 단풍 하나만으로도 결코 소박할 수 없는 가을이다. 꽃보다 화려한 단풍들이 고단한 시간들을 정리하며 마지막 몸부림의 불꽃을 태우는 시간이다. 이즘엔 어디든 눈 닿는 어디쯤에 자리하나 마련해야 한다. 그 자리에서 그동안 너무나 당연하게 여기고 살았던 시간들을 정리하며 혹시 울음의 껍질이 될지 모를 것들을 비워야 한다. 움켜쥔 것들이 바람 한 점에 불과한 것임을 깨달으며 욕심으로 고장 난 마음살이를 거두어야 한다. 혹여 일상이 남루했다 해도 사유의 시간 속으로 고여 있던 추억들이 눈을 뜨고 나타날 때 쏟아지는 그리움의 언어로 시를 건질 수 있다면 일상은 더 이상 남루하지 않게 된다. 그런데 무엇을 망설이랴. 단순한 생명으로 돌아갈 준비, 지금 하는 것이 지혜인 것을.
경기도 양평은 마치 남루한 일상에 허접함을 느끼는 이들의 가슴을 헤집어 놓겠다 작정이나 한 듯이 겹겹으로 속속으로 아름다움을 품고 있다. 가을빛에 그리움이 숨 고르기가 깊어갈 때 도무지 말려 봐도 소용없는 불길들이 술렁이면서 온 산야가 시향줄기를 뿜어낸다. 그렇게 가을은 고요한 듯 요란하게 심연의 불길에 타오르는 시어가 되어 간다. 그러나 어찌 이것이 거저 얻어지는 일일까. 그간 자연의 숨 막히는 몇 겹의 변화들이 얼마나 신중하게 이 풍경을 만들어 왔겠는가. 그 자연의 섭리에 마음으로 신전을 지어본다. 내 안의 존재와 침묵으로 소통할 수 있는 성전을. 
 
그 무엇으로 존재 될 의미
자연 앞에서는 벗어야 하리
그 무엇을 얻으려는 마음짓
자연 앞에서는 멈춰야 하리
벗은 몸 그대로 단순할 때
멈춘 숨 그대로 자유로우리
- <낙엽 앞에 서다> 중에서 -


양평의 대표 사찰 용문사는 마의태자가 망국의 한을 품고 금강산으로 가다가 이곳에 심었다는 은행나무를 현대인들의 소원을 담아 풀게 하는 ‘사랑나무’로 변신을 시켰다. 은행나무는 1100년간의 침묵을 풀어내듯 바람이 흔들릴 때마다 소원지가 흔들어대는 수많은 이들의 소원을 들으며 가장 분주한 시대를 보내고 있는 듯 보인다. 아무래도 이 나무는 자신이 존재하는 한 여전히 중생의 마음을 보듬어 줄 자세다. 나무는 때로는 바람과 한 몸 되어, 때로는 햇살과 한 몸 되어 침묵의 세월 속에서 온몸으로 역사가 된다. 따라서 나무 앞에 서면 저절로 경외심이 든다. 열매를 쏟아내고 마지막 잎을 나 떨어내면서도 오로지 내어주는 기쁨만 기억하는 그 속정, 갖고 있는 생명을 초월해서라도 순수한 영혼의 가치를 보여 주고 싶은 그 고귀한 의미를 알기 때문이다.
잠시 공양간에서 국수부터 한 그릇 챙겨 먹었다. 맑은 간장국물에 표고버섯과 김치만 넣은 국수를 먹는 템플스테이 수행자들 속에 외국인들이 많이 보였다. 그들은 어떤 마음이 고장나 한국의 사찰을 찾아온 것일까, 아니면 마음이 고장 나지 않게 예방하러 왔을까. 낯선 음식인 듯 어떻게 양념을 넣어 먹어야 할지 몰라 여기저기 눈치를 보며 국수를 받으면서도 정작 서툰 젓가락으로 맛있게 국수를 먹는 모습, 그리고 다 먹은 국수 그릇을 각각 갖고 나가 설거지를 하면서 즐거워하는 표정이 보기 좋았다.
나야말로 여전히 번뇌의 화살촉이 되어 마음 곳곳을 돌아다니는 미련의 꼬리, 미움의 잔뿌리, 분노의 흔적들을 지우기 위해 며칠간 수행을 해야 하지 않을까 생각하며 법당으로 향했다. 용문사에 올 때마다 보던 “자비무적慈悲無敵”글귀가 유난히 가슴에 닿는다. 그렇다. 다 필요 없다. ‘자비’ 하나면 적이 있을 수 없고, 있는 적도 사라진다. 그러하거늘 왜 자비를 끌어내어 사용함에 인색했던 것인가. 속으로 ‘자비무적’을 되뇌이며 도량을 돌았다.  
용문사 미소전은 햇살들이 쉬는 자리처럼 밝다. 잠시 그 자리에 앉아 나한님들의 표정과 표정, 어깨와 어깨 사이에서 내 속모습을 발견해 보는 것도 재밌는 불공이 된다. 움켜쥔 가슴을 그곳에서 펴고 살아내느라 고단했던 순간들을 풀어내는 사이, 맑아진 신심의 표시인양 미소가 저절로 지어진다.
용문산의 산령이 모셔진 산신각에선 잠시 참선을 하는 동안에도 순수한 침묵이 주는 무게감을 느끼게 한다. 그리고 눈만 뜨면 한 뼘씩 자라는 번뇌의 뿌리가 얻는 것보다 잃는 것을 더 많게 한 원천임을 깨닫게 한다. 어쩌겠는가, 그래도 이런 용문산 산신께는 거짓말을 못하겠으니 솔직해질 수밖에 없다. ‘산신님, 든든하게 품어 주고 베풀어 주는 산과 같은 친구 산우山友, 씨앗을 키워 꽃을 피우고 열매 맺게 하는 땅과 같은 친구 지우地友를 만나고 싶으니 이제 내어 주십시오. 산우인 듯 지우인 듯 세상을 속이는 중생을 미워하지 않게 도와주시고, 상처에 흔들려도 허약한 시를 쓰지 않게 산기운으로 문혼을 열어 주소서.’ 슬쩍 기도하고는 이내 이런 염치없는 기도도 욕심의 뿌리이니 부끄러움이 아닐 수 없어 슬그머니 접어 본다.
용문산 계곡의 물소리는 차를 마시고 싶은 욕심을 북돋운다. ‘솔내음 다래향’은 은행나무가 있는 자리에서 조금 아래로 들어가 보고 싶은 자리에 위치한 그냥 지나칠 수 없는 분위기를 풍기는 찻집이다.
솔내음 다래향이라는 찻집 이름에 맞게 솔차를 마시고 싶었으나 쌀쌀한 날씨에 갑자기 푹 떨어진 컨디션을 회복하고 싶은 마음에 쌍화차를 주문했다. 창밖으로 보이는 풍경은 ‘이곳에서는 더 이상 가을을 논하지 말라’고 하는 듯하다. 그냥 차 한 잔 놓고 풍경이 되어 버리면 그만이다. 곳곳에서 풍기는 국화향에 쌍화차마저도 국화차처럼 느껴진다. 
몸 건강까지 챙겨가며 쌍화차를 마시니 ‘자비무적’을 되뇌이던 마음속 상처는 저절로 치유되는 듯하다.    
 
눈으로 삼켜지는 빛바랜 단풍들이
석양녘 여백처럼 바람따라 일렁일 때
나그네 가슴속 연가 목젖 뒤로 젖는다
                    - <가을을 넘으며> 1연 -
  
온몸으로 마지막 열정을 보여 준 단풍이 결삭은 노을처럼 보인다. H.하이네 시 <사랑의 불꽃>이 “그대를 사랑하였노라, 지금도 사랑하노라/세상이 무너져 내린다 해도/그 뒹구는 파편마다/내 사랑의 불꽃은 타오르리라”를 떠올랐다. 단풍은 그 자체가 성숙한 불꽃이다. 그리고 사랑보다 더 포용력이 큰 의미로 ‘자비’가 정리된다. ‘사랑’을 자비로 여겨보니 상처도 결이 삭혀 온전하게 다 받아들이고, 순수하게 모든 것을 포옹하는 것임을 노을빛이 표정으로 말한다. 다시 돌아가야 할 시간, 단순한 생명으로 돌아갈 시간을 아름다운 산사카페에서 보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