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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해행증’으로 읽는 화엄경 (23) 체험의 길(1/6) 선재동자의 발견②

 


신규탁(연세대 철학과 교수)


 


1.
지난 10월호부터 󰡔화엄경󰡕 「입법계품 제39」를 시작했다. 이 대목에서는 ‘선재동자’라는 대승의 불법을 배우고 실천하는 구도자 등장이 주목할 만하다. 어린 구도자에게 대승 보살의 길을 알려준 선지식은 모두 53분이다. 지난달에는 「입법계품 제39」의 전체 구조를 소개했다. 이번호부터는 이어서 53분의 선지식을 ‘그룹’으로 묶어서 설명할 예정이다. 예전부터 󰡔화엄경󰡕을 전문으로 연구하는 전문 강사들은 ‘그룹’을 여섯으로 나누었다. 그것을 나열하면 ①발심하기, ②마음먹기, ③실천이론 배우기, ④회향을 어떻게 하는지 배우기, ⑤수행의 지위 배우기, ⑥깨달음의 체험이다. 이번 호에는 ①발심하기 부분을 소개하기로 한다.
①발심에 관련한 법문은 문수보살이 대중을 이끌고 선주善住 누각을 빠져나와 남쪽으로 향하면서 시작된다. 선주 누각은 사위성 근체에 있는 ‘기수급 고독원’이라는 동산 속에 있다. 문수보살이 부처님께 하직 인사를 올리고 선주 누각을 나오려는데, 그 자리에 있던 ‘성문’ 스님들도 함께 가기를 희망한다.
여기서 우리는 ‘스님’의 종류에 대해서 간단하게 이해해둘 필요가 있다. 세 부류의 스님이 있다. 첫째는 석가모니 부처님 살아계실 당시 그 부처님의 음성을 직접 듣고 함께 수행한 스님들이다. 이런 스님들이 부처님의 음성을 직접 들었다는 뜻으로, 소리 ‘성聲’ 자와 들을 ‘문聞’ 자를 써서 ‘성문聲聞’ 스님이라 한다. 그런 성문 스님의 제자도 역시 성문 스님이다. 이렇게 해서 대를 물려 지금도 남방의 스리랑카나 미얀마와 태국 등에는 성문 스님들이 수행하고 계신다.
한편, 석가모니 부처님과는 직접 관계는 없지만 홀로 도를 깨친 스님들도 계신다. 그분들을 ‘연각’ 스님이라고 한다. 다음으로 ‘성문’ 스님도 아니고, ‘연각’ 스님도 아니지만, 진리의 부처님이신 비로자나 부처님의 가르침을 믿고 배워 실천하는 스님들이 출현했다. 이들을 ‘보살’ 스님이라 하는데, 이는 대승불교권에서만 인정하는 스님이다.
남방에서는 ‘보살’ 스님의 존재를 인정하지 않는다. 물론 남방에서는 대승 경전도 불경으로 인정하지 않는다. ‘보살’ 스님이 등장하는 대표적인 대승 경전의 하나가 바로 󰡔화엄경󰡕이다. 그렇기 때문에 대승경전에서는 ‘성문’ 스님들보다 ‘보살’ 스님들을 더 훌륭하고 정통의 불제자로 여긴다. 그 사례를 󰡔화엄경󰡕 「입법계품 제39」 처음 시작 부분에서도 읽을 수 있다.
법회가 ‘기수급 고독원’에서 열렸는데도 6천 명의 ‘성문’ 스님들은 같은 숲에 있으면서도 볼 수도 들을 수도 없었다고 한다. 보지 못한 이유에 대해서 대승 불교의 학승들은 ‘수행한 선근이 다르기 때문’이라고 한다. ‘보살’ 스님들과 ‘성문’ 스님들은 수행 자체가 달랐기 때문에, 그것이 원인이 되어서 결과적으로 ‘기수급 고독원’에서 대법회가 일어나는 것을 볼 수도 들을 수도 없었다는 것이다.


2.
‘성문’ 스님들의 대표 격인 사리불 존자는 ‘비로자나 부처님의 신력’을 받잡고, 자신들도 문수보살을 따라 남쪽으로 갈 수 있게 해달라고 부처님께 청한다. 이에 부처님께서 허락하시자, 비로소 6천 ‘성문’ 스님들과 함께 문수보살 앞으로 나아갔다. 그리고는 이렇게 청한다.


“거룩하신이여, 이 비구들이 뵈오려 하나이다.”


이렇게 해서 ‘성문’ 스님의 대표가 ‘보살’ 스님의 대표인 문수보살에게 법문을 청한다. 기막힌 이야기이다. 비구가 보살에게 가르침을 청하는 대목이다. 초기 불교 경전에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 벌어지고 있다. 이하에서 <한글대장경>에 실린 운허 스님의 󰡔화엄경󰡕  「입법계품 제39」의 해당 대목을 인용해 읽어보기로 한다.
비구들은 문수보살의 발에 엎드려 절하고 합장하고 공경하여 말하였다.


“저희들이 지금 우러러 뵈옵고 공경하고 예배하는 일과, 그밖에 모든 선근을, 거룩하신 문수사리와 화상和尙이신 사리불과 석가모니 세존께서 증명하여 아시나니, 거룩하신 당신이 가지신 그러한 몸과 그러한 음성과 그러한 모습과 그렇게 자유자재하심을 저희들로 하여금 모두 얻게 하여지이다.”


초기 불교의 ‘성문’ 대중이 대승 불교의 ‘보살’ 대중에게 청법하는 장면이다. 이에 문수보살은 코끼리가 뒤를 돌아보듯이, 점잖게 그리고 천천히 뒤돌아보면 이렇게 법문을 시작하시는 것이다.


“비구들이여, 선남자와 선여인이 10가지 대승으로 나아가는 법을 성취하면 여래의 지위에 빨리 들어갈 것이거늘 하물며 보살의 지위리요.
무엇이 열인가. ⑴이른바 모든 선근을 모으는 데 마음이 고달프지 않음과, ⑵모든 부처님을 뵈옵고 섬기고 공양하는 데 마음이 고달프지 않음과, ⑶모든 부처의 법을 구하는 데 마음이 고달프지 않음과, ⑷온갖 바라밀을 행하는 데 마음이 고달프지 않음과, ⑸모든 보살의 삼매를 성취하는 데 마음이 고달프지 않음과, ⑹온갖 삼세에 차례로 들어가는 데 마음이 고달프지 않음과, ⑺시방의 부처님 세계를 두루 장엄하는 데 마음이 고달프지 않음과, ⑻일체중생을 교화하고 조복하는 데 마음이 고달프지 않음과, ⑼모든 세계의 모든 겁에서 보살의 행을 성취하는 데 마음이 고달프지 않음과, ⑽한 중생을 성취하기 위하여 모든 부처 세계의 티끌 수 바라밀을 수행하여, 여래의 한 가지 힘을 성취하며, 이와 같이 차례차례로 모든 중생을 성취하기 위하여 여래의 모든 힘을 성취하는 데 마음이 고달프지 않음이니라.”


운허 스님께서 유려한 한글로 번역하셨기 때문에 요즈음 사람들도 이해하기 크게 어렵지 않을 것이다. 중요한 특징은 부처님께 공양하고, 예경하고, 청법하는 일이며, 또 중생 구호하는 일이며, 삼매 수행하는 일이다. 이것이 대승불교이고, 이것이 불교이다. 이런 제대로 된 불교 수행인 대승불교 수행을 하면, 다음과 같은 공덕을 성취할 수 있다고 한다. 역시 운허 스님의 번역을 인용하기로 한다.


“비구여, 선남자와 선여인이 깊은 믿음을 성취하고 이 열 가지 고달프지 않은 마음을 내면, 능히 모든 선근을 기르며, 모든 생사의 길[趣]을 여의며, 모든 세간의 종자 성문을 초월하며, 성문과 벽지불의 지위에 떨어지지 않고 여래의 가문에 태어나며, 모든 보살의 소원을 갖추며, 모든 여래의 공덕을 배우며, 모든 보살의 행을 닦으며, 여래의 힘을 얻어 여러 마와 외도들을 굴복시키며, 모든 번뇌를 멸하고 보살의 지위에 들어가서 여래의 자리에 가까워지느니라.”


맨 마지막 인용문을 주목해 보자. “여래의 자리에 가까워지느니라.” 여래는 부처님을 부르는 열 가지 호칭 중의 하나이다. 위에서 말한 수행을 하면, 그러면 ‘성문’ 스님인 여러분들도 ‘부처’가 된다는 것이다. 그럴 가능성이 많아진다는 것이다. 초기 불교 경전이나 교리에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이야기이다. 초기 불교에서 부처님은 오직 한 분, 석가모니 부처님만 인정한다. 비록 아라한과를 얻는다는 이야기는 있어서도, 부처 된다는 이야기는 없다.
요즈음, ‘부처 되는 것’, ‘깨달음’, 이런 등등에 주목하기 때문에 이 이야기가 식상하게 들릴 수 있다. 그런데 위의 문맥을 잘 읽어보면 대승경전에서 강조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알 수 있을 것이다. 부처 된다는 것을 강조하려는 문맥이 아니다. 수행하라는 것이다. 그것도 중생을 위한 구호행위를 하라는 것이다. 이것이 대승의 불교이고, 대승에서는 이것이 제대로 된 불교라고 주장하는 것이다.


3.
이렇게 법문을 마친 문수보살은 ‘성문’ 스님들에게 다시 말하면 비구 스님들에게 최고의 깨달음을 얻겠노라 발심할 것을 권한다. 믿음을 내란다. 즉 부처되기를 발심하라는 것이다. 그리고서는 비구를 비롯하여 기수급고독원에 모였던 모든 대중을 거느리고 남쪽으로 향한다. 한참을 가니 인간 세상이 나온다.
마침내 ‘복성福城’에 도착한다. 그곳은 사라림娑羅林이라는 이름의 숲이었다. 문수보살께서 󰡔법계를 두루 비추는 경󰡕을 설하기 시작했다. 이 경은 무수한 경전 중에서 최상의 경전이었다. 매우 상징적인 말씀이다. 한문으로 󰡔보조법계원만광명경普照法界圓滿光明經󰡕이다. 독자들께서도 잘 음미하시기 바란다. 이와 함께 󰡔화엄경󰡕 기원전 1세기 경에 경전 작가에 의해 만들어진 경전임도 함께 말이다. 왜 이런 작업을 했을까? 또 그런 작업을 뒷날의 학문적으로 뛰어난 수행승들이 귀중하게 여겼을까? 대승大乘, 즉 중생을 실어나르는 커다란 탈 것이라고 말이다. 작가의 ‘작품’을 성인의 말씀인 ‘경經’으로 대접하는 그 심정을 읽으시길 바란다.
이런 대단한 법문이 이루어지니, ‘복성福城’에 사는 대중들이 몰려들어 온다. 그런 대중들 속에 ‘선재동자’라는 젊은이가 있는 것이다. 출가하여 삭발염의한 승려가 아니다. 대승의 짐을 지고 갈 담당자는 신분이나 지위에 특정될 수 없다. 대승을 발심한 바로 당사자 자기의 몫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