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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와 평화

박관우
아시아기자협회 운영위원

서울-부산간 평화열차
G-20 정상회의를 앞두고 아시아기자협회가 10월 29일 서울~부산간 평화열차(Peace Train)을 운행했다. 평화열차에서는 ‘평화와 상생, 번영’을 주제로 포럼이 진행됐다. 주제도 의미가 있었지만, 국내외 주요 인사들이 참석해 행사의 의미를 더했다. 정치인과 성직자, 그리고 유명배우와 외국기자들이 평화열차에 자리를 함께 했다. 나름대로 의미가 있는 행사였는데 한 일간지와 방송 보도가 부족하다는 생각에 그 당시 상황을 간략하게 옮겨본다.
첫 마이크를 잡은 김형오 전 국회의장은 전쟁은 어떤 조건에서 왜 일어났는지를 묻고 형식으로 평화에 대한 첫 화두를 꺼냈다. 결론은 전쟁은 힘이 없을 때 일어나고, 힘의 균형이 갖춰지면 평화가 유지된다고 스스로 답했다. 그러면서, KTX가 중국과 시베리아를 거쳐 영국 런던까지 이어지는 유라시아 대륙의 평화열차가 되길 바란다고 기원했다.


평화의 첫 번째 관문은 소통
종교계 인사로는 법륜스님이 첫 마이크를 잡았다. 법륜 스님은 행사 당일 오후 인천항에서 북한에 겨울용품을 보내주는 행사가 있어, 먼저 말씀을 하고, 천안-아산역에서 하차해 귀경했다. 평화의 조건으로 3가지 소통(疏通)을 얘기했다. 먼저 남북(南北)간의 소통이 중요한 것은 당연하고, 무엇 보다 남남(南南)간의 소통문제가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셋째 글로벌 시대에 세계와의 소통을 언급했다. 서로가 이심전심으로 소통이 되는데 갈등이 일어나고 전쟁이 발생하기는 어렵다며, 소통이 평화의 전제조건임을 분명히 했다. 여기에는 종교인의 노력도 중요하지만 사회 구성체 모두가 평화에 대한 열망과 노력이 필요하다고 역설했다.
이어서, 민주당 이종걸 의원과 노회찬 전(前) 진보신당 대표, 이종걸 의원, 낙산사 무문 스님, 싱가포르의 이반림(Ivan Lim)  아시아기자협회 회장, 중국 법제일보의 왕망 기자, 국내 유머박사 1호인 김재화 말글커뮤니케이션 원장 등이 평화를 위해 화기(和氣)가 넘기는 법공양(法供養)을 참석 대중들에게 올렸다.


금강경 사구게가 만든 이야기
부산행사를 마치고, 귀경하는 열차편은 공식행사를 갖지 않고, 비공식행사로 친교의 시간 겸 뒤풀이 시간을 가졌다. 그런데, 이 와중에 정말이지 우연하게 생각하지도 못한 불교와 이슬람간의 교류시간을 갖게 되었다. 종교교류라고 하기에는 너무 거창한 느낌이 있지만, 최근 일부 기독교의 불교 폄훼공격사례를 고려하면, 종교간 평화를 느낄 수 있는 소개할 만 사례라고 생각해 소개한다.
부산발 KTX가 출발한지 30~40분 지났을까, 혼자서 금강경 사구게(四句偈)를 쓰면서 내 마음의 시간을 맞이했다. 사실 필자는 어디를 가든지 법요집을 항상 지니고 다닌다. 대중교통수단 안에서는 기본적으로 천수경과 금강경, 그리고 의상대사 법성게 등을 눈으로, 또는 입으로 독송한다. 아예 통째 외워버리려고 마음먹고 있지만 쉽게 되지는 않고, 부분 암기를 하는 정도이다.
그런데 아무리 비공식 귀경시간이지만, 국내외 기자와 학자들도 있고 국제행사의 연장선상인 만큼 법요집을 내놓고 보기에는 상황이 여의치 못한 것 같아 머릿속에 있는 사구게(四句偈)를 쓰면서 이런 저런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동석했던 전(前) 충북기자협회장이 관심을 가지면서 무슨 뜻이냐고 묻는다. 뜻을 설명해 주니, 금강경은 눈치를 못 채고 마치 옛날 누군가가 쓴 한시(漢詩)라고 생각하고 계속 묻는다. 이런 대화가 대구협회장에게 옮겨지고, 급기야는 사구게를 낭송(朗誦)하게 되었다.
특히 금강경 사구게가 외국기자들에게는 한국전통문화, 아니 동양문화의 멋이라는 생각에 들었는지 거듭 설명해 달라고 요청한다. 짧은 영어실력이지만, 필담을 섞어 가며 설명해 주었다. 그리고 나름대로 기억을 되살려 선시(禪詩)를 1~2수 곁들이니, 참 재미있어 했다.

이슬람 기자의 불교 이해 사례
외국 기자 가운데 이집트 출신의 UAE 기자가 궁금증과 호기심을 놓치지 않는다. 저널리스트 겸 교수로 활동하는 분인데 금강경 사구게에 대한 관심, 필자의 눈치로 보면 한문으로 쓰여진 한시에 대한 관심이 많았다.
그래서인지 외국인의 눈으로 보기에, 외견상 서체가 좋게 보이는, 금강경 사구게야 말로, 동양문화의 이미지를 가져 호기심을 갖게 했나 보다. 사실 필자의 생각에도 불교 경전은 인쇄체도 의미를 제대로 전달하지만, 묵향(墨香)이 배어있는 모필 경전(毛筆 經典)이 진미중의 진미(眞味)라고 보고 있다. 이집트 기자의 계속된 질문에 의상대사 법성게 일부를 써서 설명해 주었더니 흥미를 갖고 뭔가 깊이 생각하는 눈치다.
이집트 출신의 이 기자는 급기야 필자를 따라서 조계사 대웅전에서 3배를 올리고, 불교에 대한 관심을 표명했는데 지금까지도 이메일을 통해 불교를 필담(筆談)으로 나누고 있다.
이슬람 신도이지만 열린 사고를 가지고, 불교와 불교문화에 대한 관심을 갖고 있어 언론인의 국제 소통을 넘어 종교소통이라는 생각이 든다.
종교와 평화를 위한 과제
평화열차와 이슬람 기자의 불교이해 사례를 보면서, 최근 잇따르고 있는 일부 개신교의 불교폄훼와 공격사례가 대조를 보이고 있다. 우리사회는 그동안 세계 어느 나라보다도 다종교 사회의 가치를 소중하게 여기면서, 세계 주요 종교가 공존해 왔다. 그런데 언제부터인가 모르지만 종교간 갈등이 커지고 있다. 솔직히 말하면 현 정부 들어 심한 것 같다. 국민의 정부와 참여정부에서는 보고, 듣지도 못한 <기독교 발(發) 종교 갈등>이 일어나고 있다. 문화부 종무실은 물론 청와대에서도 문제인식도가 낮다.
일부 기독교의 실수 내지 오해 정도로 치부하는 모양인데 실상을 몰라도 정말 모르는 것 같다.
최근 2명의 목사와 30여년간 종교담당 정보관(IO)에게 자문을 했다. 자문 결과 결론은 하나다. 일부 기독교의 문제가 아니고 전체 기독교의 문제이며, 특히 일부 자기중심적이고 정복주의적인 사고를 가진 개신교 신자들이 문제가 심각하다고 지적한다.
이웃종교에 대한 이해나 훈련이 부족한 것은 물론이고, 정상적인 기독신앙이라고 보기 어렵다는 진단이다. 심지어 일부 기독교는 불상(佛像)과 성모 마리아상을 동일시하면서, 명동성당을 공격한 사례도 있다고 한다. 아예 일부 건전한 신앙인을 제외하고, 하나님과 상관없는 종교상업집단(宗敎商業集團)에 불과하다는 분석을 내놓았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마땅한 해결책이 없다는데 문제의 심각성이 있다. 정부가 나서면 권력의 종교탄압이라고 주장할 테고, 기독교 내부가 워낙 통일성이 없다 보니, 교단 내 자체 해결능력도 없다. 신흥 개척대형교회는 누구도 손대지 못하는 성역 아닌 성역이라고 한다. 결국 여론으로 바로잡을 수밖에 없다고 하는데, 참으로 어느 세월에 문제를 보고 해결책을 찾아야 할지 막연하기만 하다. 진리를 떠나서라도 최소한 이웃을 인정하고 배려할 줄 모르는 사상과 종교는 과연 누구를 위한 것이란 말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