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월호 보기

2026년

      2026년 01월호
      2026년 02월호
      2026년 03월호
      2026년 04월호
      2026년 05월호
      2026년 06월호
      2026년 07월호
      2026년 08월호
      2026년 09월호
      2026년 10월호

2025년

      2025년 01월호
      2025년 02월호
      2025년 03월호
      2025년 04월호
      2025년 05월호
      2025년 06월호
      2025년 07월호
      2025년 08월호
      2025년 09월호
      2025년 10월호
      2025년 11월호
      2025년 12월호

2024년

      2024년 01월호
      2024년 02월호
      2024년 03월호
      2024년 04월호
      2024년 05월호
      2024년 06월호
      2024년 07월호
      2024년 08월호
      2024년 09월호
      2024년 10월호
      2024년 11월호
      2024년 12월호

2023년

      2023년 01월호
      2023년 02월호
      2023년 03월호
      2023년 04월호
      2023년 05월호
      2023년 06월호
      2023년 07월호
      2023년 08월호
      2023년 09월호
      2023년 10월호
      2023년 11월호
      2023년 12월호

2022년

      2022년 01월호
      2022년 02월호
      2022년 03월호
      2022년 04월호
      2022년 05월호
      2022년 06월호
      2022년 07월호
      2022년 08월호
      2022년 09월호
      2022년 10월호
      2022년 11월호
      2022년 12월호

2021년

      2021년 01월호
      2021년 02월호
      2021년 03월호
      2021년 04월호
      2021년 05월호
      2021년 06월호
      2021년 07월호
      2021년 08월호
      2021년 09월호
      2021년 10월호
      2021년 11월호
      2021년 12월호

2020년

      2020년 01월호
      2020년 02월호
      2020년 03월호
      2020년 04월호
      2020년 05월호
      2020년 06월호
      2020년 07월호
      2020년 08월호
      2020년 09월호
      2020년 10월호
      2020년 11월호
      2020년 12월호

2019년

      2019년 01월호
      2019년 02월호
      2019년 03월호
      2019년 04월호
      2019년 05월호
      2019년 06월호
      2019년 07월호
      2019년 08월호
      2019년 09월호
      2019년 10월호
      2019년 11월호
      2019년 12월호

2018년

      2018년 01월호
      2018년 02월호
      2018년 03월호
      2018년 04월호
      2018년 05월호
      2018년 06월호
      2018년 07월호
      2018년 08월호
      2018년 09월호
      2018년 10월호
      2018년 11월호
      2018년 12월호

2017년

      2017년 01월호
      2017년 02월호
      2017년 03월호
      2017년 04월호
      2017년 05월호
      2017년 06월호
      2017년 07월호
      2017년 08월호
      2017년 09월호
      2017년 10월호
      2017년 11월호
      2017년 12월호

2016년

      2016년 01월호
      2016년 02월호
      2016년 03월호
      2016년 04월호
      2016년 05월호
      2016년 06월호
      2016년 07월호
      2016년 08월호
      2016년 09월호
      2016년 10월호
      2016년 11월호
      2016년 12월호

2015년

      2015년 01월호
      2015년 02월호
      2015년 03월호
      2015년 04월호
      2015년 05월호
      2015년 06월호
      2015년 07월호
      2015년 08월호
      2015년 09월호
      2015년 10월호
      2015년 11월호
      2015년 12월호

2014년

      2014년 01월호
      2014년 02월호
      2014년 03월호
      2014년 04월호
      2014년 05월호
      2014년 06월호
      2014년 07월호
      2014년 08월호
      2014년 09월호
      2014년 10월호
      2014년 11월호
      2014년 12월호

2013년

      2013년 01월호
      2013년 02월호
      2013년 03월호
      2013년 04월호
      2013년 05월호
      2013년 06월호
      2013년 07월호
      2013년 08월호
      2013년 09월호
      2013년 10월호
      2013년 11월호
      2013년 12월호

2012년

      2012년 01월호
      2012년 02월호
      2012년 03월호
      2012년 04월호
      2012년 05월호
      2012년 06월호
      2012년 07월호
      2012년 08월호
      2012년 09월호
      2012년 10월호
      2012년 11월호
      2012년 12월호

2011년

      2011년 01월호
      2011년 02월호
      2011년 03월호
      2011년 04월호
      2011년 05월호
      2011년 06월호
      2011년 07월호
      2011년 08월호
      2011년 09월호
      2011년 10월호
      2011년 11월호
      2011년 12월호

2010년

      2010년 01월호
      2010년 02월호
      2010년 03월호
      2010년 04월호
      2010년 05월호
      2010년 06월호
      2010년 07월호
      2010년 08월호
      2010년 09월호
      2010년 10월호
      2010년 11월호
      2010년 12월호

2009년

      2009년 01월호
      2009년 02월호
      2009년 03월호
      2009년 04월호
      2009년 05월호
      2009년 06월호
      2009년 07월호
      2009년 08월호
      2009년 09월호
      2009년 10월호
      2009년 11월호
      2009년 12월호

2008년

      2008년 01월호
      2008년 02월호
      2008년 03월호
      2008년 04월호
      2008년 05월호
      2008년 06월호
      2008년 07월호
      2008년 08월호

2007년

      2007년 09월호
      2007년 10월호
      2007년 11월호
      2007년 12월호
불교의 희망

김주일
주간불교신문사 편집부장


이 글은 한국종교언론인협의회가 12월 2일과 3일 양일간 제주도에서 개최한 제15회 종교언론인 심포지엄 중 김주일 주간불교신문사 편집부장이 불교계 대표로 주제발표한 내용을 요약 정리한 것이다.
<편집자 주>


올해는 초조대장경 간행 1천년이 되는 해다. 그래서 이를 기념하고 그 의미를 조명하는 해인사 대장경천년세계문화축전이 열렸다. 지난 10월말부터 45일 동안 2백만 명이 넘게 다녀갈 정도로 큰 성과를 거뒀다. 그렇다면 대장경은 불교에서 어떤 의미가 있길래 이렇게 많은 이들이 관심을 갖고 열광하는 것일까?
현재 남아 있는 경판은 8만 1258판이다. 8만여 판에 8만 4000번뇌에 해당하는 법문이 실려 있으므로 팔만대장경(국보 제32호)이라고도 한다. 1237년(고종 24)부터 16년간에 걸쳐 고려에 침입한 몽골군의 격퇴를 발원해 만든 것이다. 과거에는 몽고가 쳐들어왔을 때 전 세계적으로 몽고군이 지나가면 먼지만 남는다고 했지만, 우리나라는 거꾸로 문화유산과 기록유산인 ‘팔만대장경’을 남겼다.
이어령 이화여대 명예석좌교수는 ‘2011 대장경 천년 세계문화축전’의 국민보고대회에서 특강을 통해 대장경 속에는 한국인이 가진 국난 극복의 DNA가 있다고 했다.
바꿔 말하면 왕실과 백성이 한마음으로 뭉쳐 완성한 대장경 속 가르침은 실의에 빠진 백성들에게 큰 희망과 용기를 주었다고 할 수 있다. 역사 속에서 불교가 국민들에게 희망을 준 좋은 예다. 
모든 종교가 그렇듯 불교 역시 어려울 때에는 희망을 주고, 또한 자기 자신의 행에 따라 희망을 갖게 한다. 불교를 잘못 이해하면 운명론적이라든가 허무주의적 종교로 생각하기 쉽다. 운명론적으로 행, 불행이 정해져 있다면 우리는 희망이 없는 기계적인 삶의 연속일 뿐이다. “전생의 행위는 금생의 나를 만들었지만 지금 나의 행위에 따라 미래는 결정되는 것”이라고 부처님은 설했다. 이와같이 부처님은 우리 중생에게 희망을 주셨다. 지금 내가 어떠한 마음으로 어떤 일을 하느냐, 즉 얼마나 적극적이며 능동적인 선업을 쌓느냐에 따라 미래는 만들어 진다는 것이다. 내 미래는 내가 만드는 것이지, 그 다른 무엇이 만든다든가 혹은 내 의지와는 상관없이 만들어진 예정에 의해서 살아가는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나의 삶은 본인 스스로가 책임을 질 수 밖에 없다. 그 누구도 책임질 수 없는 자신만의 영역이다.
이 땅에 태어남도, 주변의 모든 인연도 결국은 자신이 만들어 놓은 현상이다. 자신의 의지와 노력으로 변화시키고 발전해야 한다. 그러므로 불교는 희망의 종교이다.
그렇다면 우리에게 가장 피부에 와 닿는 ‘희망’이란 무엇일까? 그것은 부처님의 교리적 가르침에서도 찾아볼 수 있지만 우리와 같은 인간이 그 가르침에 충실해 세상을 바꾼다든가, 몸소 실천적 모범을 통해 진한 울림의 향기를 주는 것이다. 그래서 그런 인물들의 삶 속에서 ‘희망’을 발견하고 그 삶의 궤적들을 본받으려는 시도자체가 바로 희망이 아닌가 싶다. 딱딱한 교리보다 더 큰 감동으로 찾아오는 것은 역시 우리와 똑같은 인간이라는 점에서다.   
선불교에 영향을 받아 세상을 바꾼 애플 CEO였던 故 스티브 잡스, 평생을 무소유의 삶으로 살다가 입적한 법정 스님, 그리고 부처님 가르침 중 으뜸인 ‘보시’의 사상을 통해 불교가 우리시대에 주는 희망 메시지를 전달하고자 한다.


세상 바꾼 스티브 잡스의 ‘선불교 정신’
전 세계 젊은이들이 가장 닮고 싶어 하는 CEO로 손꼽히는 故 스티브 잡스. 그가 이끄는 애플의 제품들이 하나같이 단순하고 우아한 디자인으로 소비자들의 고정관념과 기대를 뛰어넘어 새로운 미래를 창조하고 세상에 희망을 줬던 원동력은 무엇일까.
스티브 잡스가 죽은 뒤 출간된 자서전에서 보면 스티브 잡스가 보여준 위대함의 본질을 그의 마음속에서 찾고 있다. 그리고 스티브 잡스의 통찰력과 창조적 아이디어는 동양적 깨달음과 체험에서 큰 영향을 받았다고 분석한다. 실제로 스티브 잡스는 젊은 시절에 히피 문화와 동양의 선(禪) 불교사상에 심취했으며, 또한 구루를 찾아 인도로 여행을 떠나기도 했다.
그리고 일본의 선승을 평생 멘토로 삼았으며 명상 수행을 즐겨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25세 때, 스티브 잡스의 재산은 이미 1억 달러를 넘었다. 그러나 당시 사진을 보면, 그의 방 안에는 이렇다 할 가구조차 없이 스탠드 조명과 스테레오, 명상을 위한 방석, 찻잔 하나뿐이었다. 최첨단 테크놀로지 기업을 이끌고 있는 CEO가 마치 동양 선사들의 삶의 방식을 따르고 있으며, 단순하고 거침없고 파격적인 그의 화법 그리고 권위와 관습에 얽매이지 않는 과감한 도전 역시 선사들의 그것과 닮아 있다고 한다. 이 책에서 스티브 잡스를 위대하게 만든 비범한 통찰을 세 가지로 설명한다.
① 단(單) : 단순함의 정신. 아이폰을 정면에서 바라보면 홈 버튼 하나뿐이며, 배터리도 교체할 수 없는 일체형 디자인이다.
② 파(破) : 파격의 정신. 그는 고정관념과 편견, 권위와 기존 질서에 과감히 부딪쳐 도전했다.
③ 직(直) : 곧바로의 정신. 잡스는 생각보다는 직관, 즉 마음의 소리에 항상 귀를 기울인다. 잘 알려지진 않았지만 스티브 잡스는 선 수행자다. 애플의 제품들과 잡스의 본질에는 선불교의 정신이 깃들어 있다. 세상에 지식 혁명을 일으키고 생활의 편리와 희망을 안겨다 준 배경에는 불교가 한 몫을 했다.


무소유의 삶 몸소 보여 준 법정 스님
“내 소망은 단순하게 사는 일이다. 그리고 평범하게 사는 일이다. 느낌과 의지대로 자연스럽게 살고 싶다. 그 누구도, 내 삶을 대신해서 살아줄 수 없다. 나는 나답게 살고 싶다.”
지난해 입적한 법정 스님은 우리에게 앞으로 살아갈 방향을 제시해주고 떠났다. ‘법정다운 삶’이란 어떤 삶이었을까. 그 삶 속에 우리가 간직해야 할 희망적 메시지가 있다.
순천 송광사 불일암에서 책 <무소유>를 선보인 스님은 많은 사람들이 찾아오는 것도 번거롭다며 강원도로 발길을 돌렸다. 화전민이 버리고 간 오두막에 정착한 스님은 그 곳에서 자신의 내면을 좀 더 관조하며 자연과 하나가 되어 갔다. 길상사 회주로 주석하면서도 끊임없이 무소유를 강조했다.
현대인에게 지금 필요한 것은 ‘출가정신’이라 했다. 머리를 깎고 산이나 절로 가라는 것이 아니다. 법정 스님의 ‘버리고 떠나기’는 비본질적인 것들을 버리고, 자신의 내면세계로 떠나는 것이다. 마음을 텅 비우고 무심히 지켜보는 시간을 갖고, 실(實)로써 가득 채우려고만 하지 말고 허(虛)의 여유를 가져 보려 하는 게 바로 출가정신이요 버리고 떠나기다.
법정 스님은 그 누구보다 ‘삶 예찬론자’였다. ‘우주 전체의 조화가 곧 삶이요, 생명의 신비’라 한 스님은 ‘삶은 참으로 기막히게 아름다운 것, 누가 이런 삶을 가로막을 수 있겠는가’라 했다. 그러면서도 삶은 죽음이 있기에 빛날 수 있다 했다.


부처님의 가장 큰 가르침인 ‘보시(Dana)’
올리비아 핫세는 로미오와 줄리엣을 통해서 여배우로서의 유명세를 얻었다. 그러나 그녀는 그때 만들어진 청순한 이미지를 끝내 탈피하지 못했기 때문에 이상이 없는 가운데에서 내리막의 인생을 살게 된다. 불자 연예인 중에 장동건이 있다. 그가 오늘날과 같이 성공할 수 있었던 것은 연기 폭이 넓기 때문이다.
연기 폭이 넓다는 것은 그때그때 맡은 배역에 최선을 다하고 그 배역이 끝나면 그 이미지는 버린다는 의미다.
이는 얻음과 버림이 동시에 병진할 때만이 우리의 삶이 보다 윤택해진다는 것을 잘 나타내준다. 붓다는 강을 건너면 뗏목은 버리라고 했고, 장자는 물고기를 잡으면 통발은 잊으라고 했다. 이는 진정한 얻음의 가치가 무엇인지를 우리로 하여금 알 수 있게 해준다. 즉 삶의 명확함은 얻음과 잃음이라는 중묘의 문(衆妙之門) 속에 있는 것이다. 보시는 인간의 완성을 위한 것이다. 그리고 그러한 가치는 성실하게 채운 사람을 통해서만 현현(顯現)하게 된다.
그러나 인간은 비움에 대한 인식이 상대적으로 약하다.
이 때문에 붓다는 보시라는 비움의 의미를 설하신 것이다. 왜냐하면 이를 통해서만이 인간은 진정한 행복에 도달할 수 있기 때문이다.
보시는 효율적인 놓음을 통해서 자신을 완성하는 행위다. 많이 가졌다고 해도 결국 나이와 더불어 고통으로만 다가가게 된다면, 그러한 인생에 가치가 존재하는 것일까 의문이 든다.
뱀이 허물을 벗듯, 인간은 비움을 통해서 거듭날 수 있다. 붓다의 사리를 모신 곳을 ‘적멸보궁(寂滅寶宮)’이라고 한다. 여기에서의 적멸은 언뜻 고요함의 뜻으로만 이해하기 쉬운데 이는 고요함을 통한 거대한 긍정, 즉 행복이 충만한 무진(無盡) 경계를 의미하는 것이다. 붓다께서 이러한 적멸궁에 계시는 것은 중생을 위한 보시의 실천적 행위를 통해서 정각을 성취하셨기 때문이다. 즉 붓다의 열반이라는 행복 완성은 ‘자리즉이타(自利卽利他)’가 아닌 ‘이타즉자리(利他卽自利)’를 통해서 성취된 가치인 것이다. 보시는 속박된 나를 풀어놓는 실천행이다. 이것은 타인을 위하는 동시에 곧 나를 완성하는 가치로서 물질과 정신을 일관(一貫)한다. 오늘날 우리는 붓다가 제시한 보시의 의미를 통해서 나 자신을 위한 반조(返照)가 그 어느 때보다도 절실한 시대를 살고 있다. 바로 이 점이 남을 위한 보시가 아닌 우리를 위한 보시가 필요한 이유라고 하겠다. 우리가 살고 있는 현대 사회는 무한경쟁의 사회다.
그러다 보니 능력 있는 자는 더 많이 소유할 것이고 빈부의 차는 점점 심해지면서 인간 사회는 더욱더 각박해지고 있다. 어쩌면 이 시대 이 땅에 같이 살아가고 있는 것도 우리의 공업(共業)이다. 공업 중생끼리 기쁨과 고통을 함께하는 것이 부처님의 가르침 아니겠는가.
그래서 우리 사회는 늘 베풀어주는 문화, 즉 기부문화를 절실히 갈망하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좀 더 가진 자가 덜 가진 자를 위해, 또 자신을 비우는 실천행으로써 보시를 한다면 자리이타의 실천행은 저절로 완성될 것이며, 보시를 현대적인 의미로 실현하는 멋진 방법이 될 것이다. 보시는 남을 돕는 행위이기 이전에 자신의 선본(善本)을 바로 세우고 맑히는 실천행으로 자신을 사랑하는 다른 방식의 표현이다. 부처님께서는 보시를 “놓아버림으로써 성취하는 행복”이라고 강조하셨다.
사실 보시도, 봉사도 함께 나눌 대상이 없다면 이루어질 수 없다. 가난하고 부족한 사람들이 있기에 좀 더 가진 이가 그들이 가진 것을 가난하고 부족한 사람들과 나눠 복을 지을 수 있는 기회를 주는 것, 즉 복전이 되어주는 것이니 주는 이의 마음도 받는 이의 마음에도 감사함이 있다면 그것이 진정한 보시고 봉사가 아닐까 생각한다.
지구상의 어려운 이들에게 부처님의 큰 가르침인 자비 보시를 펴는 것. 그들에게 오늘의 고단한 현실을 딛고 내일의 희망을 갖게 할 수 있는 보시 정신이야 말로 불교가 인간에게 주는 가장 큰 희망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