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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천하지 않는 행위는 독선이요, 아집입니다

최윤필
한국일보 기자


인문학을 배워 익히고 실천하는 길에 누구나 맞닥뜨리게 되는 화두 같은 질문 하나가 있습니다. 몽테뉴가 <에세(수상록)>를 열며 스스로에게 던진 질문 “Que sais-je?”입니다. 크사주, ‘나는 무엇을 아는가’라는 의미라고 합니다. 에세의 정수를 단 세 가지 질문으로 요약하는 이들도 있습니다. 나는 누구인가, 나는 무엇을 아는가, 나는 어떻게 살 것인가의 존재론, 인식론, 방법론입니다.
근대의 사상가들은 이 질문의 궁극적인 의미를 ‘방법론적 회의’라는 근사한 개념어로 정리했습니다. 무식을 조롱당할 각오로 쉬운 일상어로 풀어보자면, 우리가 아는 게 다가 아닐지 모르고, 우리가 반드시 참이라고 믿는 게 늘 참이 아닐 수 있다. 그러므로 성급하게 ‘유레카!’를 외치거나 쉽게 독단하지 말고 판단을 최대한 늦춰 꾸준히 성찰 반성 회의(懷疑)하라는 뜻입니다. 그럼으로써 나를 알고, 나의 한계를 깨닫고, 그 한계를 넘어서기 위해 끝없이 정진하라는 의미, 결국 그것이 우리가 아는 공부의 형식인 바 앞서 아는 척 하지 말고 먼저 공부에 정진하라는 의미일 것입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우리의 현실 속에는 크사주의 의미를 유구한 철학전통을 자랑하는 ‘불가지론’의 속류로 악용하는 이들도 적지 않습니다. 그들은 누구도 진실을 알지 못하고, 알 수도 없다는 궁극적 회의론자들입니다. 아니, 그런 척하는 이들입니다. 옳고 그름의 분별 앞에서도 그들은 애매한 타협을 이야기합니다. 그럼으로써 자신의 지적 나태와 비겁을 더 큰 성찰적 깨달음의 언명으로 슬그머니 감춥니다.
조계종 총무원이 한국의 큰스님 18분을 인터뷰해 최근 펴낸 <산승불회(山僧不會)>라는 책이 있습니다. 인터뷰를 진행한 저자 유철주씨가 전북 장수의 죽림정사 조실 도문스님께 “깨달음을 얻으셨느냐”고 묻자 스님의 대답이 그러했다고 합니다. 산승불회, 곧 산승은 알지 못한다는 뜻입니다. 아마도 스님은 선가에서 최고의 지식, 깨달음의 한 경지를 일컬을 때 쓰는 말 ‘단지불회(但知不會- 단지 알지 못함을 알 뿐)’를 그리 바꿔 표현하셨던 것 같습니다. 다만 갈고 닦을 뿐이라는 정진의 각오와 초심의 계율을 이르신 듯합니다.
근현대 한국불교의 대선지식 용성스님의 법손인 도문스님은 정토회를 이끄는 법륜스님의 은사스님입니다. 법륜스님의 강연은, 청중의 신분과 성격에 따라 그 내용은 늘 다르지만, 꾸짖음과 타이름의 어조를 띨 때가 많습니다. 하지만 그 강연을 즐겨 듣는 이들은 대개 강연을 다 듣고 난 뒤면 막힌 가슴이 후련해지는 것을 느끼게 된다고 합니다. 그것은 은사스님에게서 배웠을 방법론적 회의와 옳고 그름의 분별심에 근거한 것이기 때문일 것입니다.
이 분별은 차별의 분별, 억압의 분별이 아니라 크사주 너머 ‘어떻게 살 것인가’라는 선택과 판단의 분별입니다. 은사 스님은 산중에 계시며 산승불회의 의미를, 법륜스님은 세속에 머무시며 바른 삶의 길을 보이시는 셈입니다.
산문 안과 밖이 둘이 아니라는 분별 너머의 가르침에 근거할 때 두 사제스님의 길은 하나일 것입니다.
저는 이렇게 만나는 길이 궁극적인 인문학의 길이라고 이해하고 있습니다. 인식과 실천, 인식론과 방법론의 조화로써만 세상은 나아지고 깨달음은 열매를 맺는 것이겠기에. 또 그것은 먼저 깨닫고 몸으로 행해야 한다는 단계론적인 이해를 넘어, 깨달음의 형식이 실천이고, 실천의 동력이 곧 깨달음이라는 인식에 기초합니다. 그 과정에서 한시라도 고삐를 늦출 수 없는 것이 크사주의 정신이고, 산승불회 단지불회의 다짐일 것입니다. 그래서 그냥 회의가 아니라, 방법론적 회의입니다.
이처럼 세상살이는 무엇 하나 곧게 뻗은 직선 주로(走路)는 없는 성싶습니다. 다리는 아픈데 길은 굽어 있고, 이 길인 듯싶어 갔더니 엉뚱한 길이어서 다시 새 길을 찾아야 할 때도 있습니다.
옳다 싶어 마구 떠들었는데 며칠 뒤 잘못을 알게 돼 부끄러워질 때도 있고, 세상에서 가장 맛나고 몸에 좋은 것으로 알고 욕심껏 먹었는데 되레 건강을 해치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런 난처한 상황에 처해 반성하지 않고 자신의 주장을, 자신의 습관을, 자신의 그릇된 길을 내처 고집하는 것은 옳지 않음을 모르는 이는 없을 것입니다. 알지만 실천하지 않는 행위를 우리는 독선과 아집이라고 합니다.
욕망을 넘어서는 것이 깨달음의 궁극이라고 하지만 인간은 어쩌면 숨을 거두는 순간까지 욕망하는 존재일지도 모릅니다. 야수 같은 욕망의 충동 앞에서 그 욕망의 무게를 재고 욕망의 주체인 자신과 함께 이웃과 사회의 안녕이라는 공동체적 가치와 조화할 수 있는 길을 찾고, 조화할 수 없는 욕망이라면 그 욕망에 저항할 줄 아는 영혼의 힘, 그것 역시 부단한 공부와 실천을 통해 고양될 것입니다. 그것이 우리가 방법론적 회의를 실천 속에서 끝없이 반복해야 하는 이유이고, 도문스님이 산승불회라 답하신 까닭일 것입니다. 종교든 철학이든 궁극의 가치는 존재를 이해하고 삶을 올바르게 이끌어, 보다 나은 세상을 일구고자 하는 것인 바, 길은 달라도 고양된 정신이 머무는 자리는 결국 한 자리 일 것입니다.
최근 조계종불교사회연구소가 종교계에 대한 국민의 신뢰도를 조사했는데 그 결과가 가히 충격적입니다. 지난 9, 10월 전국 남녀 1,512명에게 물었는데 종교계에 대한 신뢰도는 의료계(3.22) 시민사회단체(3.22) 학계(3.16) 대기업(3.12) 교육계(3.01)보다 낮은 3.00으로 집계됐습니다.(5점 만점) 국민들이 영리를 목적으로 하는 대기업보다 종교계를 더 신뢰하지 않는다는 것은, 종교집단의 위선에 대한 과도한 질타라고 이해하려 해도, 믿기지 않을 정도입니다.
각 종교에 대한 신뢰도는 가톨릭(4.11) 불교(4.05) 개신교(3.34) 순이었고, 종교 지도자에 대한 신뢰도도 신부(4.91) 스님(4.83) 목사(4.64) 순이었습니다. 종교평화법 제정에 대해서는 찬성(29.3%) 반대(9.5%)의 적극적인 입장보다 ‘반대도 찬성도 아니다’라는 냉소적 대답이 61.2%로 압도적으로 높았습니다. 불교 신자로서 다소나마 위안을 삼을 만한 것으로는 가장 평화적인 종교로 불교가 꼽혔고(35.7%), 미래가 가장 밝은 종교로 불교(34.5%)라는 응답이 많았다는 것 정도입니다.
저는 이번 조사의 취지가 종단 스스로 회의와 성찰의 계기를 마련하고자 함이라 이해합니다. 종교는 믿음에 근거하며, 믿음을 주지 못하는 종교는 더 이상 종교가 아닐 것입니다.
그 결과로 드러난 바 반성의 숙제, 방법론적 회의의 과제가 불교계 나아가 종교계 일반에게 어마어마하게 크다는 것을 확인했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그리고 스스로를 돌아보겠다는 이 같은 작은 실천이 그 자체로써 국민들의 인식 속에 한국 불교에 대한 신뢰의 크기를 조금이나마 키워 주리라 믿습니다. 
해(年)는 기울고 날은 점점 을씨년스러워지는데 우리가 가야 할 길은 여전히 멉니다. 하지만 지금 내딛는 이 한 걸음이 이루어낼 큰 미래를 저는 기대합니다. 미래가 가장 밝은 종교로서의 불교에 대한 국민들의 기대를 산문 안에서, 또 바깥에서, 각자가 저버리지 않도록 노력해야 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