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년 11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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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행과 포교, 부처님 법 전합시다

정우頂宇 스님
본지 발행인 | 구룡사 회주



초등학교 2학년 때 저의 꿈은 운전수가 되는 것이었어요. 그래서 훗날, 『내 어릴 적 꿈은 운전수였네』 수필집을 내기도 했습니다. 그러다가 초등학교 4학년 때 봄소풍으로 갔던 서해안 바닷가의 유서 깊은 사찰, 망해사에서 스님들의 살아오신 이야기를 듣다가 스님이 되어야겠다는 마음을 가지게 되었고, 15살 되던 해에 출가하게 됐습니다.
이산혜연선사 발원문怡山惠然禪師發願文처럼 다겁전생多劫前生의 인연에 따라 “아이로서 출가하여 귀와 눈이 총명하고 말과 뜻이 진실해야한다”는 염원이 발현된 것이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을 해보기도 하였습니다.


그렇게 출가한 뒤 68년에 통도사로 가게 되고 25살 젊은 나이에 통도사를 떠나게 되어, 걱정하고 계실 어른 스님들께 편지로 인사를 드렸습니다.
그러자 월하 노스님은 제가 살고 있는 작은 절에 두 번이나 다녀가셨습니다. 그런가 하면 76세 벽안 노스님은 답서를 보내주시며 용기를 보내 주셨습니다.


“정우를 보내고 궁금하던 차 편지를 받아보고 반겨하였다.
공부를 위한 것이니 아무쪼록 공부를 착실히 하고 돌아와서 통도를 위하고 불교를 위해서 크게 활약하고 훌륭한 승려가 되어라. 우리 불교는 현재 이 사회에 바램 을 응수하지 못하고 있다. 젊은 세대는 반성해서 구습을 타파하여라.
76년 10월 12일. 노승 벽안 답서.”


어른 스님들을 생각하면 왜 우리가 전법傳法을 해야 하고 수행자의 길을 걷고 포교布敎 일선에서 대중과 함께 어울림을 가져야 하는지 생각을 하게 합니다. 20대 중반 때 여러 어른 스님들께 여쭤본 궁금한 것이 있었습니다.
“스님, 상구보리上求菩提의 수행修行이란 무엇입니까.”
어느 스님은 그 무엇에도 치우치거나 얽매이거나 빠지지 않는 것을 수행이라 한다 했습니다. 그런데 석주 노스님께서는 ‘하심下心하고 인욕忍辱하는 것이 참 수행’이라 하셨습니다. 하심, 나를 낮추고 인욕, 슬프고 괴롭고 고통스러운 것만 참는 것이 아니라, 기쁘고 즐거운 것도 참을 줄 알아야 한다는 가르침이기도 하셨습니다. 그런 마음을 지금까지도 간직하면서 살아가고 있는 것, 모두가 어른 스님들의 그늘 밑에서 자상한 가르침이 자양분이 되어서 우리를 성장하게 하셨던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이런 일들을 생각해보면 우리도 후학들에게 어른 스님들이 하셨던 말씀처럼 그늘이 되어주고 자상한 자양분의 연민심憐愍心을 나눌 수 있는 우리가 되도록 노력해야 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이는 출가한 수행자에게만 해당하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불자 모두에게도 다 같이 적용되어야 한다고 할 것입니다.
상구보리하화중생上求菩提下化衆生의 상구보리는 수행과 정진을 의미하는 것이요, 깨달음을 위해서 나아가는 길입니다.
하화중생은 중생과 더불어 어울리는 것, 대중포교를 하겠다는 서원입니다.
그래서 부처님께서는 생전에 제자들에게 이렇게 당부하셨습니다.


“자 대중들이여, 길을 떠나자. 처음도 좋고 중간도 좋고 끝도 좋으니, 조리 있는 말로 알아들을 수 있도록 법을 설하자. 갔던 길로 되돌아오지 말고, 두 사람이 함께 떠나지도 말자. 모든 이의 이익과 안락과 행복을 위해서 길을 떠나자. 나도 우루 벨라 병장 촌에 가서 법을 설하리라.”


오늘 법회에 가족이 함께 오신 분 있으면 손 한번 들어보세요. 이분들에게 박수 한 번 보내주세요. 비례대표처럼 혼자 오시는 불자님들은 다음 법회부터는 온 가족이 손에 손잡고 함께 오시도록 해주시길 바랍니다.
상구보리의 수행을 불자들이 각종 재일이나 기도와 법회에 참석해서 법당에서 기도하는 것을 의미한다면, 하화중생은 전도선언의 포교뿐만 아니라 세상과 더불어 살아가면서 그들에게 그늘이 되어주고 울타리가 되어주면서 자상한 자양분으로 연민심을 나눌 수 있는 모습이 모든 행원이라 할 것입니다.
이분론법二分論法으로 보면 세상에는 두 유형의 사람이 있습니다.
지혜 있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어리석은 사람이 있고, 믿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믿지 않는 사람이 있습니다. 또 믿는 사람 중에도 절에 가는 사람과 절에 가지 않는 사람이 있으며, 절에 가는 사람 중에도 예배하는 사람과 예배하지 않는 사람이 있습니다. 예배하는 사람 중에도 법문 듣는 사람과 법문 듣지 않는 사람이 있으며, 법문 듣는 사람 중에도 지극한 마음으로 듣는 사람과 건성으로 듣는 사람이 있습니다. 지극한 마음으로 듣는 사람 중에도 생각한 대로 행동하는 사람과 행동하지 않는 사람이 있으며, 생각한 대로 행동하는 사람 중에도 더불어 살아가는 이들을 생각하는 사람과 자기만을 생각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이처럼 세상에는 잘나고 못난 것에 대한 비유를 수없이 들 수 있지만, 진정으로 불교를 믿는 불자라면 지혜 있는 사람 중에서도 믿는 사람, 믿는 사람 중에서도 절에 가는 사람, 절에 가는 사람 중에서도 예배하는 사람, 예배하는 사람 중에서도 법문 듣는 사람, 법문 듣는 사람 중에서도 지극한 마음으로 듣는 사람, 지극한 마음으로 듣는 사람 중에서도 생각한 대로 행동하는 사람, 생각한 대로 행동하는 사람 중에서도 더불어 살아가는 이들을 생각하는 사람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그러한 불자야말로 수승한 사람이라 할 수 있습니다.


‘출가해서 수행자가 되는 일이 어찌 작은 일이겠습니까. 출가한 사람들은 편안하고 한가함을 구해서도 아니요, 따뜻이 입고 배불리 먹기 위해서도 아닙니다. 명예나 재산을 구해서도 아닙니다. 오로지 생사生死의 괴로움에서 벗어나려고, 번뇌煩惱의 속박束縛을 끊으려고, 부처님의 지혜를, 고통 받고 있는 중생들을 건지기 위해서 수행자가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나아가 전법 활동을 하는 대중과 어울림을 가지는 보살이 되기 위해서일 것입니다.’ -『선가구감禪̀家龜鑑』에서
중국의 위지안 작가는 『오늘 내가 살아갈 이유』라는 책에서 말합니다. “사람이 잘 살아간다는 것은 누군가의 마음에 씨앗을 심는 일과도 같다.
어떤 씨앗은 내가 심었다는 사실을 까맣게 잊어버린 뒤에도 쑥쑥 자라나 커다란 나무가 되기도 한다.”
베트남의 틱낫한 스님도 말합니다. “그대가 꽃과 나무에 물을 줄 때 그것은 지구 전체에 물을 주는 것이다. 꽃과 나무에 말을 거는 것은 그대 자신에게 말을 거는 것이다.”
우리는 이 세상에 모든 것들과 연결되어 있습니다. 인생을 살아가면서 무겁고 힘든 것이 있다고 느끼면, 그럴 때일수록 그것을 마음으로부터 내려놓고 다시 시작해보라는 메시지일 것입니다.
스위스의 의사이자 심리학자인 엘리자베스 퀴블러 로스는 『인생 수업』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배움을 얻는다는 것은 다른 사람이 아닌 자기 자신의 인생을 사는 것을 의미한다. 갑자기 더 행복해지거나 부자가 되거나 강해지는 것이 아니라, 세상을 더 깊이 이해하고 자기 자신과 더 평화롭게 지내는 것을 의미한다. 배움을 얻는다는 것은 자신의 인생을 사는 것을 의미한다.
아무도 내가 배워야 할 것이 무엇인지 알려줄 수 있는 사람은 없다. 그것을 발견하는 것은 나 자신만의 여행이다.”


상구보리라는 수행과 하화중생이라는 포교를 이루기 위해서는 먼저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가르침이 있습니다. “먼저 사람이 되어라. 중생들은 내 복 밭이고 선지식이다. 나는 이와 같이 배우고 닦아 익혀서 한 중생의 마음에도 어기지 않는 삶을 살리라.”
그러니 바로 사람답게 살아야 합니다. 그래서 모두가 최상의 깨달음을 얻고 평등한 지혜를 가지며 바른 복을 갖추어 널리 선행을 닦다가 마침내 열반에 들도록 해야 합니다. 열반이란 번뇌가 일어나지 않는 자리요, 번뇌를 끊는 것이 해탈이라는 진리를 항상 명심하며 살아가야 할 것입니다.


인도의 카스트 계급 중에서 가장 상위계층을 바라문婆羅門이라고 합니다.
부처님 당시에 바라문 승려 500명이 부처님께 와서 묻습니다.
“천하의 모든 작용은 있는 것입니까, 없는 것입니까.”
창조주가 있는지 없는지를 묻자 부처님께서 답하십니다.
“있기도 하고 없기도 하다.”
그러자 다시 묻습니다.
“언제는 있다고 하고 언제는 없다고 합니까.”
“살아있는 자는 있다고 하고 죽은 자는 없다고 하기 때문에 있기도 하고 없기도 하다 하느니라.”
“그렇다면 만물의 영장인 사람들은 어떻게 해서 생겼습니까.”
“사람은 곡식에 의해서 생겨나고 또 곡식에 의해서 살아간다.”
“그렇다면 곡식은 어디서 생겼습니까.”
“곡식은 네 가지 큰 것, 지수화풍地水火風에서 생겼다.”
“그렇다면 지수화풍을 어디서 생겼습니까.”
“지수화풍은 허공에서 생겼다.”
“허공은 그러면 어디서 생겼습니까.”
“허공은 존재와 가지고 있는 바가 없는 데서 생겼다.”
“그것은 또 어디서 생겼습니까.”
“자연에서 생겼다.”
“자연은 어디에서 생겼습니까.”
“자연은 열반에서 생겼다.”
“조금 전에 열반은 번뇌가 일어나지 않는 자리를 열반이라고 했는데, 열반은 어디서 생겼습니까.”
그러자 부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어리석구나. 바라문들이여, 열반이라고 하는 것은 생겨나거나 사라지는 일이 없는 것이니라.”
제법공상諸法空相이 열반이라는 말씀입니다. 불생불멸 불구부정 부증불감不生不滅 不垢不淨 不增不減이라, 모든 법은 공하여 나지도 멸하지도 않으며, 더럽지도 깨끗하지도 않으며, 늘 지도 줄지도 않는다는 가르침입니다.
바라문이 다시 묻습니다. “만약 열반의 진정한 의미를 우리에게 알려주지 못한다면 우리는 동의할 수 없습니다.”
그러자 이번에는 부처님께서 바라문에게 묻습니다.
“내 이제 그대들에게 묻노니 중생의 삶은 괴로움이냐 즐거움이냐.”
“중생의 삶은 심히 괴롭습니다.”
“왜? 괴롭다고 생각하느냐.”
“중생들이 죽을 때 괴로워하는 것을 저는 보았기 때문입니다. 너무 괴로워 어쩔 줄을 모르는 것을 보고 죽음은 괴로움이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대는 아직 죽지도 않았는데 어떻게 죽음이 괴로움인 줄 알 수 있단 말이냐. 네가 이제 죽지 않고도 죽음이 괴로움인 줄 알듯, 내가 시방세계 모든 부처님들이 나고 죽음이 없는 열반의 경지를 체득하여 영원히 즐겁고 청정하고 자아를 매각하지 않음을 보고 열반이 항상 즐거움인 줄 아느니라.”


그렇습니다. 있는 자, 똑똑한 자, 심지어 수행자까지도 죽을 때 괴로워하는 모습을 걱정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러나 수행을 잘했으면 괴로워할 일이 없습니다. 생사生死는 호흡 하나에 달려 있습니다. 숨 한 번 안 쉬면 죽습니다.
그러니 상락아정常樂我淨, 생멸 변천함이 없는 열반의 경지인 상常, 생사의 고통을 여의어 무위無爲 안락인 락樂, 망집妄執의 아我를 여의고 팔대자재八大自在가 있는 진아眞我인 아我, 번뇌의 더러움을 여의어 담연청정湛然淸淨한 정淨의 열반涅槃의 사덕四德을 충분히 인식하면서 살아갈 수가 있다면 모든 가족이 함께 동사섭同事攝 하면서 부처님 제자로서 살아가는 데 큰 어려움이 없지 않을까 싶은 마음을 전합니다.